2020. 11. 14. 10:39ㆍFilm
시실리 2km 결말 l 신정원 감독의 유려 깊은 코미디
시실리 2km (To Catch a Virgin Ghost) 2004
감독 : 신정원
각본 : 신정원, 황인호, 이창시
출연 : 임창정, 권오중, 임은경, 변희봉, 우현, 안내상, 김윤석, 박혁권, 최원영
시실리 2km 줄거리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훔친 석태(권오중)는 시실리를 지나던 중 교통사고가 났다. 순박해 보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마음이 풀린 석태는 시실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무사히 있나 확인하는 과정에서 어이없는 사고로 사망해버렸고 마을 사람들은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뒤집어쓸까 봐 시체를 유기하기로 결심했다.
석태의 절친이고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석태가 훔친 다이아몬드를 되찾으려던 양이(임창정)는 겨우겨우 석태가 있는 시실리까지 도착했지만 시실리 마을 사람들은 석태의 행방을 일러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석태의 양말을 발견하고 석태가 아직 시실리에 있는 것을 확신한다. 석태는 어디에 있는 거며 이 수상한 시실리 마을 사람들은 뭘 숨기고 있는 걸까.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을 보고 신정원 감독에게 완전히 매료된 나는 그의 필모를 전부 다 끝내겠다는 결심을 했다. 시실리 2km는 신정원 감독의 첫 감독 데뷔작으로 무려 16년 전 개봉한 영화임에도 꽤나 실험적이고 과감했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의 전신에는 시실리 2km가 있었고, 신정원 감독의 화법과 코미디는 꽤나 유려 깊고 전통 있는 것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자꾸만 살아나는 석태(권오중)를 보며. 뜬금없이 칼을 꺼내 당락권을 선보이는 양이(임창정)를 보며. 갑자기 팬티도 입지 않고 전력질주로 동네를 활보하는 그들을 보며. "신정원 감독의 코미디가 이런 것이었지..!" 하고 생각했다.
정말 즐겁게 봤다. 매우 호불호를 탈 작품이지만 나에게는 완전 '호'다. 나처럼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을 재밌게 보셨다는 써니 님께 추천드리고 싶다.
※ 시실리 2km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글입니다.
맥거핀인 줄 알았지만 맥거핀이 아닌 석태
석태가 분명 대단한 캐릭터일 것 같았는데 초반에 쉬이 사망해버리고 만다. 그것도 콧구멍에 무척 비싼 다이아몬드를 꽃아 넣고. 사람이 죽었는데 죽은 장면 만으로도 큰 웃음을 선사한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도 죽을 수 있단 말이야?'란 생각이 들게 하거든.
오프닝 시퀀스에서 비장해 보였던 석태가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아 석태는 장소만 제공해주고 사라져 버리는 맥거핀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석태는 주인공이다. 석태는 죽지 않는다. 벽 속에 갇혀도. 이마에 못이 박혀도. 땅에 묻혀도. 번개를 맞아도. 석태는 절대 죽지 않는다.
스테레오타입 비틀기
시실리 2km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클리셰를 비튼 설정이 많다. 보편적인 스테레오타입을 무척 잘 이용했다. 예를 들면 '시골 사람들은 착하고 순박할 거야.'라든가 '조폭이라면 캐릭터가 들어간 양말은 신지 않을 거야.'와 같은 것이다. 앞서 말한 '석태'가 죽은 줄 알았지만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나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것도 그렇다.
교통사고를 당해 시실리에 도착한 석태가 바라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옹기종기 앉아 밭일을 하고 사고가 난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모습이나, 처음 봤음에도 질퍽한 농담을 스스럼없이 건네는 걸 보면 역시 '시골 사람들이 선하고 정이 많아.'란 생각을 하게 한다.
석태를 찾으려고 필사적인 양이는 마을 사람들이 석태가 어딨는지 모른다고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것이 단순히 석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려고 사람을 죽여 유기한 것이 아니라.
양이는 석태의 양말을 발견하곤 마을 사람들의 말과 달리 그가 아직 시실리에 있다고 확신했다. 근데 그 양말이 참 재밌다. 검은색 양말인데 키티가 그려져 있다. 키티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고, 남자아이보단 여자 아이가 선호하는 캐릭터다.
성인 남성이고 하물며 직업이 조폭인 남성이 키티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을 신고 있다? 하물며 그 양말이 석태의 것임을 확신하는 양이를 보면 석태가 주위 사람들이 알 정도로 키티를 좋아해서 키티 굿즈를 꽤 사모은다는 말이 된다. 신정원 감독은 '키티 양말'로 보통의 조폭 남성에게 기대할 수 있는 클리셰를 깨버렸다. 그것이 무척 재밌다.
신정원 감독의 코미디
신정원 감독의 '코미디'는 역사가 매우 깊은 것이었다.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칼 두 개를 손에 쥐고 당락권을 선보이는 것도, 귀신을 보고 놀라서 건장한 네 남성이 알몸으로 전력질주를 할 때 중요부위에만 모자이크 처리를 해 놓은 것도 그렇지만, 가장 압권이었던 걸 꼽으라면 '개띠'다.
해주 역할을 맡은 우현 님은 나이가 많은 조폭 역할을 맡았다. 그가 개띠라고 하니까 양이는 너 왜 이렇게 늙었냐며 82년생이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해서 70년생이라고 묻자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58년 개띠라는 말이 된다.
양이는 해주가 58년 개띠라는 걸 알고는 앞으로 자신에게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한다. 왜 부르면 안 되냐고 하자
"야 이 ㅆㅂㅅㄲ야. 네가 94야 그럼?"
임창정 님이 후에 밝힌 일화로는 저것이 애드리브이었다고 하더라. 참 꾼이야 꾼.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며칠 전 리뷰하였던 디 오너스도 그렇지만, 시실리 2km 역시 양이 일행이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역할이 뒤바뀐다. 양이와 일행들은 '조폭'이고 가장 신체적으로 건강한 20대에서 30대의 젊은 남성들이다. 그에 반해 시실리 마을 주민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분들이고 게 중에는 노인도 있으며 여성도 있다.
양이 일행은 그들에게 완전히 당해버렸다. 그들이 석태의 콧구멍에서 발견한 단 한 개의 다이아몬드를 차지하려고 전부 협심하여 시신을 유기할 정도로 나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다. 마을 사람들에게 살인은 처음이 아니다. 그들은 사실 전과자였으며 오갈 데 없는 그들을 원장 선생님이 품어주었지만 그놈의 '돈'때문에 원장 선생님을 죽이고 그를 잘 따르던 송이까지 고의로 살해했다.
석태의 콧구멍 속 다이아몬드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유기한 그들은 돈이라면 살인 따위 우습게 저지를 수 있을 정도로 악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하나로 산사람도 유기하는데 양이 손에 있는 그 많은 다이아몬드를 보고는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다. 시실리에 도착하기 전에 얼마나 나쁜 일을 저질렀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갑자기 폐교에서 예쁜 처녀 귀신인 송이가 등장한 게 맥락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의 존재는 무척 중요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악행을 알려주었고 실질적으로 저승사자에게서 양이의 목숨을 구했다. 지금 손에 쥔 것 말고도 다이아몬드가 더 있다는 양이의 말을 믿고 단체로 다이아몬드를 털러 가는 마을 사람들을 송이가 운전자에게 빙의하여 사고를 내 전부 사망하게 했다. 시실리 마을 사람들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이다.
양이는 마을 사람들이 묘를 만들어주긴 했지만 관리를 전혀 해주지 않아 응달이 져 춥다고 말했던 송이를 위해 묘지에 해가 잘 들어 잔디가 잘 자라고 따뜻할 수 있도록 송이의 묘를 가리는 나무들을 부하들을 시켜 모두 베어버리고 정성이 가득한 제사상을 올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지금은 대스타가 된 배우들의 신인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다. 더불어 배우 임창정의 연기가 더 보고 싶다. 이렇게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밉지 않게 이렇게도 잘할 수 있는 배우가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이 재밌었던 분들께도 시실리 2km를 추천드린다. 대한민국 줄넘기협회장 이미소 회장의 직인이 찍힌 써티피케이트처럼, 시실리 2km 역시 디테일한 코미디가 상당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2004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보니 지금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여성에 대한 것이 특히 그랬다. 이것은 감안하고 보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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