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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녀(1970)_열병같은 청춘의 자화상 충녀(1970)_열병같은 청춘의 자화상

충녀(1970)_열병같은 청춘의 자화상

2020. 6. 12. 18:00Film

충녀(Insect Woman) 1970
감독 : 김기영
출연 : 윤여정, 남궁원, 김주미, 박인찬, 이대근

 

줄거리

고등학생인 명자(윤여정)는 어머니가 첩이기에 아버지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정이 어려워지자 요정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첫 남자였던 김동식(남궁원)의 첩이 되어 살림을 차린다. 김동식은 명망 있고 성공한 부인 때문에 사회에서도 집안에서도 억눌려 성불능자가 되지만 명자를 만나며 활기를 찾는다. 본처와 합의하여 김동식을 나눠갖기로 했지만 명자는 동식의 본부인(전계현)을 찾아가 남편을 포기할 것을 원한다. 김동식은 본부인과 첩인 명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전에 영화 교양서 서평을 쓰며 대학생 때 영화의 이해란 강의를 수강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충녀는 그때 한 번 보았다. 그 교수님께서 가장 비중을 두었던 감독은 알프레도 히치콕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당시 히치콕에 관심이 생겨 그의 영화를 많이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김기영 감독을 알게 됐다. 왜냐하면 김기영 감독이 한국의 히치콕이란 별명을 지닌 감독이어서 그렇다.

 

 

 

히치콕이 "새"에서 영감을 받았던 감독이라면(아예 the birds라는 영화가 있기도 하다.) 김기영 감독은 "쥐"에 영감을 많이 받았던 감독이다. 하녀, 화녀, 충녀 시리즈에는 어김없이 쥐가 등장한다. 이번 충녀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연출과 미장센.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도 영화를 본지 오래되어서 세세한 스토리까진 기억나지 않았지만,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두 가지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아들내미 대학을 보내려고 딸에게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요정으로 취직할 것을 권유했던 어머니와, 하나는 사탕 정사신이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명자는 아직 19살밖에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첩의 자식이기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다. 명자는 학교에서 친구들의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걸린 건 한 번이었지만 다른 학우들이 이전에도 도둑질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한 두 번 도둑질을 한 게 아닌 듯했다. 

 

 

내가 충녀를 본 지 오래되었어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한 장면. 서두에도 언급했던 그 장면은 바로 명자의 어머니가 명자에게 요정에 취직할 것을 권했던 장면이다. 공부를 곧 잘하는 것 같았던 명자는 아마도 공부에 별 취미가 없는 오빠와 막냇동생의 학비를 대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어머니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네가 이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큰오빠 대학교 학비와 막냇동생의 대학 학비까지 책임져야 하니 돈이 적잖이 들어가야 할 터였다. 세상천지에 자기가 낳은 딸아이를 제 손으로 요정에 보내는 어미가 있을까. 명자의 어머닌 네 오빠가 대학교 못 들어가면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명자는 싫다고 하자 큰오빠는 명자를 보기 좋게 때렸다. 제 동생이 요정에서 일해 번 돈으로 대학 공부하고 싶은 오빠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대학을 다닌다 한들 마음이 편할까.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명자는 요정에 근무하게 됐다. 가장으로서.

 

 

 

둘이 만나게 된 과정도 꽤나 어처구니가 없다. 김동식은 너무나도 유약한 인물이다. 사업적으로 성공하고 인정받은 부인과 달리 김동식은 사회적으로도 가장으로서도 남성성으로도 무력하다. 부인에게 용돈을 받아 쓰고 있고, 부인의 기에 눌린 탓인지 남성 구실을 못한지도 오래되었다. 그것을 살려보고자 요정에서 알게 된 명자를 요정 마담의 도움으로 명자를 취한 것이다. 명자를 힘으로 제압해 때리고는 그 느낌이 좋았다 말하였다. 김동식은 제 딸 벌에 자기 등치의 절반도 안 될 여자를 때리고는 우월감을 느낄 정도로 애잔한 인물이다.

 

 

명자가 김동식을 사랑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을 줄 수 없다고 했지만 그게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집착이었는지. 순수한 사랑 그 자체는 아니었다고 본다. 씁쓸했던 건 명자는 김동식과 밤을 함께 보낸 후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첩이 되었다. 사랑해서도 아니었고, 연출되었던 상황에서 겁박으로 벌어진 일이었는데 말이다.

 

 

 

본부인은 보살이 아닌가 싶었다.(물론 그녀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작은댁(작은댁이라는 말이 황당하지만 영화에서 그렇게 표현하였으므로 그대로 적기로 한다.)을 인정했다. 집도 얻어다 주고 용돈도 준다. 부인(전계현)은 남편에게 용돈을 주는 것처럼 명자에게도 용돈을 주고 생활비도 준다. 단 남편은 12시 전에는 돌려보내야 한다. 외박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가끔 우리나라 70년대 80년대 영화를 보다 보면 "남편의 외도쯤이야 나한텐 전혀 신경 쓸 일 아니야. 남자가 사회생활하다 보면 젊은 여자한테 끌릴 수도 있지."와 같은 대사를 하는 부인들을 종종 본다. 속은 미어터질지언정,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는 걸까.

 

 

부인은 보통이 아니다. 우선 집은 마련해주었고 용돈도 주고 작은댁으로 인정해 본인의 생일 파티에도 초대하였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저 x을 없애지?' 하고 상당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명자도 보통은 아니다. 명자도 부인만큼 셈이 빠르고 두뇌회전이 빠른 인물이다. 여기에서 김동식은 한 번도 부인 앞에 명자 앞에서 나서는 법이 없다. 명자가 집에 들어와서 "저는 첩이에요. 남편분과 함께 살고 있어요." 할 때도 부인 뒤에 숨어 가만히 있었고 명자가 가끔 찾아와서 하소연을 할 때나 자신을 찾을 때도 몰래 숨어 좀처럼 나타나는 법이 없다. 영화 충녀는 철저히 여성 서사다. 문제를 제공한 김동식은 부수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명자는 첩이 돼서 엄마를 찾아갔다. 명자의 엄마가 말하길 할머니도 첩이었단다. 명자의 할머니, 명자의 어머니처럼 명자도 첩이 되고 말았다. 뭐 좋은 거라고 그런 걸 대물림 한단 말인가.

 

 

명자의 어머니는 본처와 피 튀기는 신경전을 벌였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명자는 본부인과 서로 규칙을 정해 순순히 따르고 있었으므로 훨씬 협조적이었다. 충녀에서 가장 나쁜 인물을 꼽으라면 난 명자의 엄마를 고를 것이다. 제 손으로 딸을 요정에 보내는 것도 모자라 본인처럼 첩이 되게 만들었다. 명자가 생활비라며 건네주자 명자의 엄마는 명자가 첩일을 하며 번 돈을 받아 들고는 얼마나 되는지 한 장 한 장 세고 있었다. 혀를 내두르게 했다. 

 

 

명자는 처음엔 본부인과 약속을 지키고 순순히 잘 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동식을 온전히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첩의 자식으로서 아버지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됐던 건지 첩의 자식이었던 자신의 삶이 고달팠던 걸 알기 때문에 자식은 만들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도 나중엔 어떻게든 임신을 하려고 몸부림친 것도 자신의 자리와 입지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마음이었을 거다. 죽여서까지 가지려고 했던 건 그를 사랑해서라기보단 그를 뺏기기 싫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명자가 가진 거라곤 그 하나인데 그가 없어지면 명자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김동식 역시 명자를 깊게 사랑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잘난 부인에게 기가 눌려 남성성이 죽어버린 남자였고 다만 자기보다 못한 여자로 자신의 우월성을 느끼려 했던 것뿐이다. 나보다 못 한 여자.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여자. 내 기를 살려줄 수 있는 여자.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그래서 부담이 없는 여자.

 

 

명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뒤도 안 돌아보며 "우리 식구들은 너한테 잘해줬어. 다만 네가 운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명자를 향한 그의 마음이 한낱 종잇장처럼 가벼웠음을 알 수 있지 않나.

 

 

명자는 영화 충녀에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요정에 가기 싫다고 하자 친오빠에게 맞았고. 관계를 거부했다가 김동식에게 맞았고. 요정 마담에게 맞았고. 본처 집에 찾아갔다가 본처에게 맞았고. 김동식의 아들에게도 맞았고. 나중엔 운전수에게도 맞았다. 그렇게 두들겨 맞아도 울지도 않고 언제 맞았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는 명자. 어떻게 보면 대단해.

 

 

 

영화 이름이 충녀인 것은 벌레 충자를 써서 충녀이다. 영화 도입부 정신병원에서 의사는 사마귀를 예로 들었다. 암사마귀는 수사마귀와 관계 후 수사마귀를 잡아먹는다고 말이다. 충녀 포스터만 봐도 유추할 수 있다. 명자도 본처도 결국 남편을 잡아먹게 된 암사마귀와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김동식은 할 줄 아는 게 없다. 가장의 역할도 아비로서의 역할도 남편으로서의 역할도 사회인으로서의 역할도 모두 할 수가 없다. 명자는 김동식에게 왜 그렇게 부인에게 쩔쩔매느냐고 하자, 엄마 이야기를 했다. 어렸을 때 엄마에게 쩔쩔맸다고 하였다. 밥을 달라고, 간식을 달라고, 사탕을 달라고 말이다. 명자가 알록달록한 색색깔의 사탕을 주르륵 깔아놓고 김동식과 관계를 가진 건 아마 그 이유였을 것이다.

 

 

명자가 학생일 때,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청춘"이 뭐냐고 물었다. 여러 학생들이 청춘에 대한 정의를 말했다. 학생들은 청춘에 대해서 젊음, 용기, 행동, 순수, 아마추어, 열병(니체가 청춘을 열병이라고 했단다.)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청춘이란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용기라고 했다. 영화 말미에 명자는 "청춘이란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용기"라고 복기하며 울부짖었다. 명자에게 청춘은 무엇이었을까. 

 

 

결말이 아쉬운 건, 마치 모든 것이 병원에 입원해있던 김동식의 일장춘몽이라는 식으로 끝나서 그렇다. 드라마 파리의 유혹에서 김정은이 꿈꾼 것으로 결말을 내버려 얼마나 원성을 들었던가. 

 

 

김기영 감독의 하녀, 화녀, 충녀 시리즈 중 충녀로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하녀와 화녀의 리뷰는 천천히 보고 올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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