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27. 21:01ㆍFilm
가스 라이팅의 시초_영화 가스등 줄거리 결말 해석
가스등 (Gaslight, 1944)
감독 : 조지 큐커
원작 : 패트릭 해밀턴
출연 : 잉그리드 버그만, 샤를르 보와이에, 조셉 거튼, 데임 메이 위티
줄거리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인 '앨리스 엘퀴스트'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되지만 경찰은 범인을 잡는데 실패하였다. 이후 이 집을 물려받은 유일한 상속녀인 조카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는 이탈리아로 성악 수업을 받기 위해 보내진다. 하지만 폴라는 성악 선생님 집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고 있던 잘 생긴 그레고리(찰스 보이어)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중도에 성악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레고리와 결혼한 폴라는 10년 만에 런던으로 돌아와 앨리스에게 물려받은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막상 앨리스의 집으로 들어오고 나자 그레고리는 온갖 구실을 붙여서 폴라의 외출을 막고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가기 시작한다. 그레고리를 실제 보석 도둑이자 폴라의 이모인 앨리스 엘퀴스트의 살인범으로 그녀가 지니고 있던 유명한 보석을 가로채기 위해 폴라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그레고리의 교묘한 속임수로 폴라는 자신이 사소한 물건을 읽어버리거나 남편의 시계를 가져가고도 기억 못 한다며 믿으며 점점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된다. 밤마다 방 안의 가스등이 희미해지고 다락방에서 소음이 들리자 폴라는 남편에게 말하지만 그레고리는 오히려 폴라가 상상 속에서 꾸며낸 일이라며 그녀를 미쳤다고 몰아세운다. 그러다 예전 앨리스의 팬이던 런던 경시청의 브라이언 경위(조셉 코튼)가 그레고리의 수상한 행동을 목격하고 의심하게 된다. 폴라를 찾아온 브라이언은 희미해지는 가스등과 미심쩍은 발자국 소리에 관한 그녀의 얘길 듣고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낸다. 그레고리는 밤마다 근처의 빈집을 통해 자신의 집으로 건너온 뒤 다락방으로 숨어들어 앨리스의 보석을 몰래 찾고 있었던 것이다. 종국에 폴라는 그레고리의 정체를 밝혀내고 자신을 되찾게 된다.
영화 리뷰를 하기에 앞서 가스 라이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서술해야 할 듯싶다.
가스 라이팅 :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정신적 학대에 해당한다.
거부, 반박, 전환, 경시, 망각, 부인 등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그 사람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이로써 타인에 대한 통제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가스타이팅은 가스등(Gas light)이라는 연극에서 비롯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로, 이 연극에서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만들고는 부인이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아내를 탓한다.
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며 가정, 학교, 군대, 직장 등 수직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일상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 유명한 가스 라이팅의 어원이 가스등이란 연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얼마 전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을 읽고 알았다. 그들이 다룬 영화 중에서 내가 보지 못한 영화가 더러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내 구미를 당긴 것은 바로 가스등이어서 얼른 보았다. 1944년도에 나온 작품임에도 치밀한 시나리오와 미장센이 압권이다. 가스 라이팅이 얼마나 무서운지, 사람을 실제로 미치게 할 수 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조작된 만남
이래서 남자를 잘 만나야 하는데. 성악 공부만 너무 오래 한 건지 남자 보는 눈이 너무나도 없는 폴라는 이탈리아에 유학 가서 이모 살인범+사기꾼=그레고리를 만나 버렸다.
우연이 열차에서 만난 아주머니와 대화한 것으로 유추하건대 폴라는 아직 이모를 잃은 것을 극복하지 못한 듯했다. 엄마가 자신을 낳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모가 엄마와 다름없기도 했고, 어린 소녀일 때 사망한 이모의 모습을 그대로 보기도 해서 극복하기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비스킷도 나눠주고 이모의 죽음을 재밌는 추리소설처럼 이야기하며 살갑게 말을 붙이는 아주머니를 즉시 자리를 옮기고 경계했다. 10년이 지났어도 폴라에게 이모의 죽음은 아직 마주하지 못했고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다. 도망치듯 기차에서 내렸을 때 정착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레고리를 보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분명 결혼에 대해 폴라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했는데 거긴 왜 따라온 거니? 하나를 보면 열을 알지.
그레고리는 폴라에게 접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폴라의 선생님 밑으로 들어갔을 거다. 어리고 천진한 폴라를 꿰어낸 것도 다 계획되어있던 일이다. 유년시절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모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곳이기도 하기에 폴라에게 런던은 그리운 장소이면서도 두려운 장소였을 거다. 그레고리는 기어코 런던의 앨리스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해야겠다고 했다. 폴라는 싫은 내색이 역력했지만 강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보다 그레고리의 감정을 더 우선시해서다.
교묘한 가스 라이팅
처음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한다. 폴라가 가방에 넣어두었던 브로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자잘한 물건들의 위치를 바꾼다. 집에 있는 물건들이 사라지고 가스등은 조금씩 어두워진다. 천장에서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계속 난다. 그레고리는 폴라가 미쳤기 때문에 현실과 허구를 혼동하는 거라 말한다.
꼭 주문을 거는 것처럼 폴라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그레고리는 줄곧 이렇게 말한다.
"당신 건망증이 심하잖아."
"당신 잘 잃어버리잖아."
"당신 몽유병이 있잖아."
"당신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그런 일은 없었어. 당신이 꿈을 꾼 모양이야."
그레고리는 폴라가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허구인지를 가늠할 수 없게끔 폴라를 조종한다.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에게도 멀쩡한 폴라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없을 때 혹시라도 폴라 혼자 외출하는 것을 막으려고 말이다. 폴라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나중엔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집 밖에 잠시 나가는 것조차.
장작을 넣는 것 정도는 폴라가 혼자 할 수 있는데도 그레고리는 기어코 하인인 낸시에게 시켜야 한다며 강압한다. 집에서 수고해주시는 분들을 은근히 하대하는 그레고리에게 그런 사고방식은 옳지 않다고 폴라가 말하자, 그는 이내 젊은 가정부인 '낸시'를 불렀고 폴라 앞에서 낸시 칭찬을 했다. 칭찬하는 건 좋은데 "폴라도 이러면 좋을 텐데. 폴라에게 좀 알려주지 그래?" 하는 아주 격이 떨어지는 칭찬. 대놓고 폴라를 하대하며 망신 주는 행동이다.
가스 라이팅은 두 관계에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가능하다. 폴라는 남편인 그레고리를 믿었기 때문에,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말도 신뢰한 것이다. 분명 자신이 편지를 보았어도, 브로치를 잃어버리지 않았어도, 물건을 옮기지 않았어도. 그레고리가 그랬다고 하니 '내가 그런 건가?' 하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나중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리도록.
폴라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낸시'는 폴라보다 훨씬 자유로운 삶을 산다. 우선 스스로 경제적인 활동을 하며 돈을 벌고 있고 경찰과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성인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거는 마땅히 누리고 있으니까. 반대로 훨씬 부유하고 고등 교육을 받은 폴라는 낸시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사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정도다. 외출을 하는 것조차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니까.
폴라의 고집으로 파티에 온 그레고리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시계가 없어졌다 트집을 잡더니 폴라의 가방에서 시계를 꺼내는 묘기를 선보인다.(확실히 사기꾼이 맞는 것 같은 게, 저런 마술도 사기꾼 짓 하면서 배운 게 아닌가 싶다.) 결국 폴라는 격해지는 감정을 견딜 수 없어 공연 중 큰 소리로 울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모처럼 한 외출이었는데.. 그레고리는 폴라를 부축하며 "(제 부인이 문제가 있어서)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큰 소동이 났네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마치 폴라가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해 폴라의 대외활동과 사회적 입지를 더더욱 좁혔다. 아마 폴라가 다시는 외출하겠다는 소리를 못 하게 하려고 지독한 짓을 한 듯했다.
overcome
폴라를 믿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경찰로 근무하는 브라이언이다. 줄곧 그레고리를 의심하던 사람. 이모의 장갑 한쪽을 갖고 있던 사람. 폴라를 보고 이모가 다시 환생한 줄 알았던 사람. 폴라를 구해줄 사람.
"당신 말이 맞아요. 가스등이 조금씩 어두워지네요. 이상한 소리가 들리네요."
폴라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니 폴라는 무척이나 쉽게 그레고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레고리의 말이 거짓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레고리가 병적으로 폴라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막고 혼자서 외출하는 것을 막았던 거다. 철저히 고립된 상태여야 더 교묘하게 조종하기 편하니까. 이렇게 아니라고 해주고 자기 말에 동조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쉬이 알게 되는데 말이야.(이단 종교가 포교할 때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가 이것과 같다. 외부에 있는 사람이 '그거 사이비잖아. 그거 아니야!' 현혹되지 마! 그 사람 만나지 마!"라고 언질만 조금 해줘도 자신이 사이비 종교에 빠진 걸 깨닫고 쉽게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레고리는 폴라를 조종하려 했다. 만에 하나 폴라가 그레고리의 꾐에 넘어가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폴라는 정신을 완전히 차린 듯했다.
그레고리는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하면서 여태껏 훔쳐온 폴라의 물건을 지척에 숨겨두었는데 폴라는 남편이 열어보지 말라고 하니 그가 없을 때에도 그의 물건을 뒤져볼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그런 짓을 벌일 거라곤 전혀 짐작을 못 한 거다. 가스등이 어두움에도 남편이 아니라고 하니 믿어버리게 된 거고. 이제와 보니 가정부 중에서 귀가 잘 안 들리는 분이 계셨는데, 그레고리가 일부러 그분을 고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폴라가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냐며 물었을 때 전연 듣지 못하셨던 이유는 폴라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나중에 그레고리를 잡으려던 경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셨기 때문에) 단순히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였으니까.
and other stories
* 몇 년 전 한 대학원생과 담당 교수의 일이 이슈가 됐다. 그 교수는 (교수라는 직권을 이용하여) 대학원생에게 인분을 먹였고 폭행을 일삼았다. 같은 대학원생에게 그를 대신 폭행하라며 시키기도 했다. 이 사건 역시 가스 라이팅에 해당한다. 신뢰가 기반이 된 관계. 그리고 수직적인 관계라면 가스 라이팅을 당하기 더 쉽다.
* 가스 라이팅을 다룬 최근의 영화로는 '나를 찾아줘'와 '인비저블 맨'이 있다. 꼭 폭력을 하거나 조종을 하는 것 만이 가스 라이팅이 아니다. 상대를 무기력하게 하는 거.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아예 대화를 피해버리는 것도 가스 라이팅에 해당한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로 하여금 '내가 문제가 있구나.'다 내 탓이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것도.
*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는 남편이었던 '닉'이 그랬다. 폭력적이었고 외도도 했고, 부인인 '에이미'와 대화할 때 일방적으로 대화 자체를 피해버렸다. 상대가 무기력하게끔 말이다. '인비저블 맨'에선 '가스등'과 비슷한 방식으로 남자 친구인 안드레아가 여자 친구인 세실리아를 미친 여자로 만들어 주위로부터 고립되게 만들고 세실리아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다. 세실리아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의심하게 만들어서 정신 착란 증상에 이르게 했다.
* 올해가 잉그리드 버드만 출생 100주년이라고 한다. 그가 너무 예뻐서 극에 몰입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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