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5. 21:31ㆍFilm
소리도 없이 결말 리뷰 후기 스포 l 뭐지 이 기괴한 영화는
소리도 없이 (Voice of Silence) 2020
각본, 감독 : 홍의정
출연 : 유아인, 유재명
소리도 없이 줄거리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전문적으로 시체를 파묻는 일을 하며 벌이를 하는 태인과 창복은 단골이었던 조직의 실장에게 부탁을 받고 11살 된 아이 '초희'를 며칠간 떠맡게 됐다. 허나 실장이 죽어버렸고 그 둘은 골치 아픈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 그들은 유괴범이 되었다.
영화를 다 본 후에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응? 끝이라고? 이렇게?"
얼마 전 '클리셰'에 대한 글을 올렸다.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농축된 엄연한 대중 산업이며 흥행을 위해선 클리셰가 어느 정도는 꼭 필요하다. 클리셰를 전연 사용하지 않았을 때 영화는 매우 실험적이 될 수 있으며 대중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
신파와 클리셰에 대해 지적하면서도 그런 한국 영화에 깊이 스며들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부분에서의 '초희'를 보며 이 영화가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이란 걸 알아차렸다.
소리도 없이는 홍의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신예 감독이 유아인, 유재명과 같은 스타 배우의 캐스팅에 성공했다는 건 시나리오가 퍽 대단했다는 방증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홍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았다. 홍의정 감독은 소리도 없이에 대해 "자신이 결정하지 못한 삶 속에서 생존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이 한마디라면 소리도 없이의 기괴한 결말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내 멋대로 되지 않아 뒤엉켜버린 삶 속에서 살아보겠다고 저지른 짓이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 건지,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는 건지 자문하게 된다.
사회의 도덕적 기준과 관념은 보편적이지 않다. 개인마다 다르다. 같은 사건을 놓고 보더라도 어떤 이는 "그게 뭐가 어때서? 먹고살려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람의 탈을 쓰고 그렇게 살면 안 되지."라고 한다.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그저 이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열심히 일한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려고 성실하게 살았으니 그들이 저지른 추악한 범죄는 정당한 것이 되며 온당 용서받아야 하는 걸까.
※ 소리도 없이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퍽 개인적인 글입니다.
뭔데?
초반 시퀀스는 솔직히 지루하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언가 블랙 코미디 같은 건가 생각했다. 무슨 2인 1조로 팀을 지어 현수막을 거는 것처럼 창복과 태인은 힘을 합쳐 태연하게 사람을 매달고 그 사람이 죽으면 잔해물을 정리해 잘 처리하여 땅에 묻는다. 일련의 과정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조금도 상식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다.
본업은 계란 장수다. 계란 장수만으로 먹고살기 힘든 것인지 그들은 기괴한 부업을 하고 있다. 무슨 이야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신정원 감독의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과 비슷한 결의 영화일까 생각했다. 그런 지루한 일처리를 하던 도중 11살의 초희가 그들 앞에 나타난다. 초희를 며칠 동안 맡아달라던 실장은 사망해 버렸다. 창복과 태인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만 맡았었는데 졸지에 유괴범이 됐다.
11살
초등학생 아이들을 잠깐 가르쳐 본 적이 있다. 11살의 나이면 초등학교 4학년이다. 그 정도면 뭐가 좋고 나쁜지 충분히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나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다.
토끼 가면을 쓰고 창복과 태인 앞에 나타는 '초희'는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자신이 납치가 됐고 2억이라는 돈을 부모님이 가져오지 않으면 자신이 팔려갈 걸 안다. 영특한 아이다.
동생인 문주를 챙기고 어르고 달랜다. 함께 놀아주고 밥을 차린다. 시키지도 않은 빨래를 도맡아 한다. 어른인 태인에게 거슬릴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오빠와 함께 먹어야 한다고 태인이 씻고 올 때까지 기다리며 동생이 만두를 편히 먹을 수 있도록 조그만 크기로 잘라 주기까지 한다.
난 초희가 이 엉뚱한 가족에 매료된 게 아닐까 하는 무척 순진한 생각을 했다. 초희의 부모님은 오랫동안 그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보통의 부모라면 아이가 유괴됐을 때 난리법석이 나야 정상인데 초희는 꽤나 오랫동안 태인의 가족과 함께했으니까. 아마 가정에서 학습했을 훈육법으로 문주를 달래는 것을 보며 초희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 예상은 완전히 틀렸다.
태인은 악인일까 선인일까
태인은 분명 '악인'이다. 시체를 수습하여 밥벌이를 한다. 돈을 벌고자 이번엔 유괴까지 저질렀다. 허나 태인을 나쁜 놈이라고 맘껏 미워할 수 없다. 그의 선한 성정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태인은 늘 마을 어귀에서 나물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에게 말없이 계란을 건넨다.
유괴한 초희를 혼자 둘 수 없어 살인 현장에 데려가기도 하는데 초희 앞에 떨어진 핏자국을 애써 발로 지우기도 한다. 밤에 혼자 화장실을 가기 무서워하는 초희와 함께 화장실에 가주고, 말을 하지 않는 그는 자신이 있다는 걸 알려주려 끊임없이 박수를 치기도 한다. 초희의 아빠가 돈을 가져오지 않아 결국 인신매매범들에게 초희를 넘기고 집에 와서 아이가 정리해놓은 수트를 보고는 그 순간 바로 초희에게 달려가 그를 구해내기도 한다.
태인은 악인과 선인이라고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경계선은 모호하고 흐릿하다. 세상사 모든 일을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명징하게 나눌 수 없듯, 태인이라는 인물을 절대 악인 혹은 절대 선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도 없이'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겐 다양한 자아가 존재한다. 태인은 분명 평면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보통의 우리들처럼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태인'이라는 캐릭터는 이 영화에 대단한 핍진성을 부여한다.
결국 태인은 초희를 놓아주기로 했다.
당신이 기대한 결말
손을 꼭 붙잡고 가던 태인과 초희는 학교 안에서 초희의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태인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담임 선생님께 달려가려는 초희의 손을 꼭 붙잡고는 한동안 놔주지 않는다. 태인의 감정을 뭐라 분명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아쉬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담임선생님에게 달려간 초희는 태인이 누구냐고 묻는 선생님에게 귓속말을 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뻔한 생각을 하게 된다. 늘 봐오던 '신파 클리셰'를 떠올린단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담보'역시 아이를 유괴하게 되는 서사다. 유괴범과 아이는 깊은 유대관계를 갖게 되고 아빠와 자식이 된다. 보통의 한국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란 말이다.
홍의정 감독은 그런 우리의 바람을 보기 좋게 비튼다. 초희는 태인이 유괴범이라고 말했다. 무언의 허탈감이 든다. 배신당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들이 함께 웃고 사진을 찍는 기괴한 유사가족의 형태를 보며 아마 난 어렴풋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 '어느 가족'처럼 혈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독특한 가족이 진짜 가족이 되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퍽 천진하게 기대했었을 수도 있다.
담임 선생님이 유괴범을 잡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에 놀란 태인이 호흡곤란이 올 정도로 한참을 달리던 그 순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아. 태인은 유괴범이었지."
자신을 구하러 온 경찰이 사망하게 되자 그를 묻어야 한다며 말없이 태인에게 삽을 건네주던 초희. 태인의 수트를 빨아 예쁘게 다림질해놓았던 초희.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태인의 손을 꼭 붙잡고 해맑게 자신의 교실이 어딘지 말해주던 초희는 태인이 유괴범이란 사실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을 영화 말미에 다다라서야 겨우 알아차린 것이다.
문이 잠겨 있을 때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초희가 태인을 다시 마주쳤을 때 보인 반응은, 우연히 만났던 이상한 아저씨로부터 이제 안전하겠구나라는 안도감이 아니라, 그가 살아남기 위해 순순히 행동하였던 것이었음을.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에도 설마 쿠키 영상이 더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다소 당황스러운 결말이었다. 멍한 기분이 잦아들자 이내 이 영화가 소름 끼치게 공포스럽단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태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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