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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의 하루 리뷰 l 2021년 마지막 날에 소설가 구보의 하루 리뷰 l 2021년 마지막 날에

소설가 구보의 하루 리뷰 l 2021년 마지막 날에

2021. 12. 31. 13:27Film

소설가 구보의 하루 (Sisypuhs's vacation) 2021
감독 : 임현묵
원착 :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출연 : 박종환, 김새벽, 기주봉, 문창길, 김경익 

 

소설가 구보의 하루 줄거리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살아가는 소설가 구보는 선배가 편집장으로 근무하는 영세한 출판사에 자신의 소설을 투고하려 모처럼 집 밖을 나섰다. 영화는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다양한 사람들과 맞닥뜨리는 구보의 하루를 조명한다.

 

 

2021년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2022년 새로운 해가 다가온 다기보다, 나에겐 새로운 달이 시작된다는 느낌이 더 크다. 해가 바뀌는 것을 유난스레 여기지 않고, 나이를 먹는 것에 담담해져서다. 물론 이전보다 그렇다는 것이지 초연해졌다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가 아니어도, 분명 일 년이란 기간 동안 스스로 성장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성장 없이 나이만 먹는 것 같다는 느낌만큼 겁이 나는 것 없었으니까.

 

오늘만큼은 의미 있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2021년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영화 말이다.

그리고, 무척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 <소설가 구보의 하루>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소설가 구보의 하루>는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된다.

 

엄마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일까. 거의 집에만 머무르는 구보는 모처럼 이른 아침 집을 나선다. 필름 카메라를 처분하고, 선배에게 소설의 투고를 부탁하고, 전 연인과 연락하고, 오래전 이웃과 조우하고, 오래된 친구와 술을 마신다.

 

말수가 없고 검박한 옷차림.

끼니를 잘 챙겨 먹지 않는지 푸석한 얼굴.

좋게 말하면 겸손이고 나쁘게 말하면 수줍음이다.

어린 소녀도 아니고, 중년 남성이 숫기가 없는 건 퍽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다.

 

구보씨는 그 어느 것에도 의연해 보였고, 무기력해 보이기도 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여기까지인 게 아닐까..'라고 스스로 결정을 내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수 문학과 필름 카메라


구보는 순수문학을 쓰는 작가다.

모두들 아실 것이다. 순수문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 팔리지 않으니까.

 

모두들 구보를 안타까워한다.

구보의 엄마는 젊은 나이에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아들이 이제 그만 번듯한 직장에 다녔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구보의 하숙집 주인 같았던 어르신 역시 젊은 사람이 왜 맨날 집에만 있냐고 바깥바람 좀 쐬라고 성화다.

 

구보의 선배는 이제 그만 구보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순문학이 아닌 사람들이 찾아 있는 글을 쓰거나 그게 안 된다면 자서전 대필이라도 써서 생계를 꾸렸으면 좋겠다. 

 

구보는 순수문학을 쓰고, 필름 카메라를 좋아한다.

그것이 구보씨와 참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돈 되는 웹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이 아닌, 간편한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아무도 읽지 않는 고루한 순수문학을 쓰고, 손이 많이 가는 구닥다리 필름 카메라를 쓰는 사람.

 

그렇다. 구보는 고루하고 구닥다리인 사람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뀌어가는 세상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고집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밥 좀 굶고 단벌신사가 되는 것쯤이야 전연 문제 되지 않는다.

 

내 시간만 정체된 것 같을 때


구보는 서울 거리를 배회하다가 오래전 연인과 들렀던 카페를 마주한다.

 

비슷한 옷을 입고 있지만 곁에 이미 헤어진 여자 친구가 있어서 뭔가 했는데,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5년 전의 구보는 지금과 똑같다. 같은 코트, 같은 바지, 같은 가방, 같은 핸드폰. 여전히 글은 쓰지만, 대중성이 없어 출판을 하지 못하는 신춘문예에 등단한 '전적'만 있는 소설가였을 것이다.

 

전 연인은 작가로서 입지를 다진 것 같았고, 이미 결혼한 지 몇 해가 지났다.

 

오래전 옆집에 살던 이웃을 우연히 만났을 때,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할 예정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드디어 자신의 작품을 올릴 수 있게 됐다.

 

모두의 시간은 흘러간다.

구보의 시간은 멈춰있다.

 

새로운 아침이 될 것 같아


익숙하지 않은 것이 설렘과 기대를 준다.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면 그 익숙함을 지우려 노력해야 한다.
단면을 스치듯 보며, 순간의 감각으로 새로움을 느껴야 한다.


글 쓰는 게 익숙해지고, 하루하루 눈 뜨는 게 익숙해지고, 비슷한 하루하루를 사는 게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을 지우려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말조차 잊었을 때,

자신의 글을 모두 읽었다는 배우 지유의 말에 구보는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는다.

 

기분 좋은 만남을 파하고, 선배에게 대필 자서전을 써보겠다는 문자를 보내며 구보씨는 집으로 향한다.

 

누가 먼저 한 말인진 모르겠지만, 유현준 교수의 영상에서 머리를 치는 것 같은 워딩이 있었다.

 

차선이 모여 최선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듣고 하버드에 입학하고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되고 당연히 순탄한 삶을 살았을 줄 알았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때 흠칫 놀랐다.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해서 차선의 선택을 해왔던 그가 삶을 되돌아봤더니 그 차선의 선택이 모여 최선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창피한 말이지만 많이 울었다. 그런 말을 해준 어른이 없었다. 늘 최선의 선택을 해오려고 발악했던 나는 차선을 선택하느니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워딩 하나로, 나는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갈지,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 가닥을 잡았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하기 싫은 걸 하는 것은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가웠다.

쓰고 싶은 글만 쓰려면 밥 좀 굶는 거 상관없고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던 소설가 구보가 자서전 대필을 쓰겠다고 선뜻 문자를 보내는 것이.

 

임현묵 감독은 이전에도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오마주한 단편 영화 <서울, 2016년 겨울>을 만들었다고 한다. 김승옥 작가의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그 구질구질하고 궁상맞음이 좋거든.

 

오래전 발표된 소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이번 영화를 만든 것처럼, 문학을 사랑하는 이 같았다. 영화감독이니 서사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것일 테다.

 

다가오는 해가 마냥 무섭지 않다.

조금은 기대가 된다.

 

올해 계획했던 것들을 반은 이뤘고 반은 이루지 못했다.

내년엔 조금 더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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