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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홍등 l 비극적인 서사 속 승자는 누구인가 영화 홍등 l 비극적인 서사 속 승자는 누구인가

영화 홍등 l 비극적인 서사 속 승자는 누구인가

2022. 3. 27. 22:19Film

홍등 (Raise the Red Lantern) 1991
감독 : 장예모
원작 : 쑤퉁의 <처첩성군>
출연 : 공리, 마정무, 조취분, 김숙원, 하새비

 

홍등 줄거리 (※스포 포함)

1920년대 중국. 송련은 아버지가 작고하신 뒤 계모의 권유로 학업을 관두고 진 가문의 넷째 첩이 되었다. 그는 매일 밤 네 명의 부인 중 한 부인의 처소에서 잠을 자는데 선택된 부인의 처소에는 홍등을 환하게 밝히는 것이 그 집안의 가풍이다. 부인들은 서로 시기하고 모략을 일삼는다. 분위기에 휩쓸리던 홍련은 어느 순간 자신의 처지가 한낱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송련은 셋째 부인이 외도가 발각된 후 집안의 하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뒤로 미쳐버리게 됐다. 셋째 부인의 죽음에도, 넷째 부인인 송련이 미쳐버려도, 진은 다음 해 젊은 다섯 번째 부인을 새로 들였다.

 

 

1920년대. 마치 자금성을 떠올릴만한 가공한 규모의 진 어른댁. 눈이 소복이 내리면 무수히 켜진 새빨간 홍등이 대비되어 미장센을 이뤘다. 빨간색을 더욱더 두드러지게 만드는 칼라는 바로 흰색이니까.

 

'송련'은 고등교육을 받았던 신여성이었지만, 가세가 기울고 하는 수 없이 네 번째 첩이 되었다. 화장끼 없이 하얀 옷을 입고 집에 들어선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악랄해지며 점차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지배적으로 드는 생각은 서글픔이었다. 

 

※ 영화 홍등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홍등이 의미하는 것


진 어른댁 가풍이라는 것이 퍽 재밌다. 매일 밤 처소에 들르는 부인 집에 '홍등'을 밝히는 것이다.

 

매일 밤, 네 명의 부인은 처소 앞에서 진 어른의 간택을 기다린다. 간택이 결정된 부인의 방은 수십 개의 새빨간 홍등을 환하게 밝힌다. 그의 선택을 받은 부인은 발 마사지를 받을 수 있고, 다음날 아침 메뉴를 고를 수 있다. 진사 댁의 선택을 받아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시 얻게 되는 '작디작은' 권력이다. 차마 권력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낭패스러운 것들이다.

 

진 어른댁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날이 늘어나면, 부인들의 무시는 물론, 하인들의 무시까지 함께 받아야 한다. 이 우스운 시스템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 송련은 필사적이 되어 간다. 적어도 다른 부인들만큼은 악독해지고 영악해져야 송련 역시 진사 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빨간 홍등 속 선택을 기다리는 여성들. 무엇을 함의하는지 짐작하셨을 테니 구태여 말하지는 않겠다.

 

점차 붉게 변화하는 송련


이 영화를 떠올리면 새빨간 홍등이 떠오른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고,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장치이기도 하고. 그것에 욕망하여 첩에 시종까지 서로를 모략하고 시기하고 함정에 빠뜨렸으니.

 

송련은 임신을 했다는 거짓말을 했고, 착한 척 자신의 편을 들으면서 실은 자신을 가장 저주하고 있었던 둘째 부인의 귀를 잘라버리기도 했다. 발마사지, 홍등을 밝히는 것과 같은 권력을 쥐려 그 속에서 송련은 악독하게 흑화 한다.

 

하룻밤 동침으로 얻게 된 얄팍한 권력은 마치 사탕과도 같아서 금세 녹아 사그라진다. 순간의 먼지 같은 권력을 위해 끊임없이 서로를 미워해야만 한다. 나 스스로 내 손에 권력을 넣는 것은 불가하다. 그것은 남편의 손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봉건적 시스템 속 승자는 누구인가


가수였던 예쁜 셋째 부인은 의원과의 바람이 들통나 가풍에 따라 죽임을 당했다. 그 꼴을 지켜본 넷째 부인 송련 역시 제정신에 살지 못하고 미쳐버렸다. 

 

그렇다면 권력의 또 다른 징표인 아들이 있는 정부인이나 평범한 외모로 진 어른의 간택을 부려보려 마사지를 하는 등 재간을 부리던 둘째 부인이 승자일까.

 

비극적인 시스템 속에서. 이 지저분한 암투 속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품 속 선명하게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던 진 어른댁이 승자라면 승자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것에서 더 나아가면 진 어른의 행위에 정당성을 준 봉건적인 시스템에 있을 것이다. 부인이 넷이나 있는데도 시종에게까지 손을 대고, 선택을 받지 못한 부인들이 밤새 노래를 부르고 임신 해프닝을 벌이는 것을. 칠거지악을 들먹이며 부인들이 어질지 못하다며 탓하는 것이 옳은 걸까.

 

등장하는 부인과 첩들에 시종까지 피해자다.

 

다섯째 부인이 암시하는 것


송련이 미치고 일 년이 지난 시점. 진 어른은 다섯 번째 부인을 들였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송련이 처음 진 어른댁에 발을 들였던 앳된 얼굴이 다섯째 부인의 얼굴에 오버랩된다. 얼핏 봐도 송련보다 나이가 적어 보인다.

 

셋째 부인을 홀연히 살해하고, 넷째 부인 송련이 미쳐버렸어도, 진 어른댁의 가풍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진 어른이 살아있는 한 20살 내외의 새 부인은 계속 들일 것이며, 동침을 하는 부인의 처소를 붉은 홍등으로 밝힐 것이며 그는 다음날 아침 메뉴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몰락해가는 봉건시대에서 진 가문이 그 집만의 한심할 만큼 고매한 규율과 가풍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나 그의 죽음 전까지 선택된 부인의 처소를 밝힐 홍등에 나는 조금 음울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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