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8. 13:12ㆍFilm
만추 (Late Autumn) 2011
감독 / 각본 : 김태용
출연 : 현빈, 탕웨이
줄거리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된 애나는 어머니의 부고로 7년 만에 3일의 특별 휴가를 받았다. 그는 장례식에 가기 위해 탑승한 시애틀행 버스에서 쫓기듯 버스에 올라탄 훈을 만나고 차비를 빌려준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여자들에게 상황에 맞는 에스코트 서비스로 밥벌이를 하는 그는 누군가로부터 쫓기는 중이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의 여운이 짙게 남아 있다. 영화를 두 번 본 것도 모자라 각본집까지 읽고는 탕웨이의 전 영화인 <만추>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의 남편인 김태용 감독과 인연을 만들어준 영화. 평소 멜로 영화는 좋아하지 않아서 여태껏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영화였다.
만추는 1966년도에 개봉한 이만희 감독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아쉽게도 필름이 유실되어 지금은 만나볼 수 없지만 매력적인 스토리로 6개의 리메이크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늦가을이란 뜻의 만추는 추운 겨울을 앞두고 고졸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긴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원작 캐릭터의 특성은 살려오되 그만의 스타일로 변주를 했다. 한국이 아닌 이국적인 시애틀을 배경으로 중국인 여자와 한국인 남자의 사랑을 다룬다. 그 둘은 짧은 기간 동안 모국어가 아닌 타국의 언어로 소통하며 서로에게 깊게 빠져들게 된다.
※ 영화 <만추>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왠지 모를 울적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는
이번에도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 낭패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고작 3일의 휴가가 주어진 재소자와 사랑과 마음을 파는 남자가 어떤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시애틀 버스에서 조우한 그들을 보자마자 이 영화의 결말이 그리 아름답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했다.
보통의 나는 낯선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나는 서사를 사랑한다. <비포선라이즈>, <비포선셋>. <비포미드나잇>으로 이어지는 비포 트릴로지 시리즈를 손에 꼽히게 좋아하며, 단 하루의 사랑을 그린 고전 <로마의 휴일>도 사랑한다.
<만추>가 앞서 설명한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두 인물 모두 그들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크나큰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형편이라는 것이 어울리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사랑을 할 형편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를 사랑할 수도,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 같았다.
훈은 말이 좋아 에스코트지 사실은 성을 파는 남성이다. 자신을 사랑한 여자가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그의 남편에게 쫓김을 당하고 있다.
애나는 상황을 이르잡아 말해주지 않기에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된 재소자다. 자유로이 바깥세상에 있을 수 있는 건 엄마의 장례식 기간인 3일뿐이다.
궁금했다. 저 둘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될까.
누군가를 알아가고 사랑하는 데 있어 시간은 꽤 중요한 요소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둘이 언제부터 서로에게 빠졌는지는 나도 정확히 짚어낼 수가 없다.
애나가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 틈에서 묘한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낀 뒤 훈에게서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끊임없이 다음에 만날 구실을 마련해내며 들이댔던 훈의 마음에 녹아들게 된 것인지. 그가 자신의 상황과 직업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 때문이었는지.
중국어라고는 좋아/나빠 밖에 할 줄 모르는 훈이를 앞에 두고, 애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해왔던 사랑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정말 사랑했던 남자와 어그러진 후 결혼한 남자의 의처증으로 괴로웠던 결혼생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재소자가 된 지금까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좋아와 나빠를 반복하며 맞장구를 치는 훈과,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끝도 없이 이야기하는 애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던 애나는 아마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훈에게는 할 수 있었다.
둘이서 곳곳을 여행하는 동안 시애틀은 시종일관 안개가 껴있다. 만추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요소로 안개를 선택한 듯했다. 채도가 낮고 탁색이 함유된 배경. 러닝타임 내내 화장기 없는 얼굴과 헤어로 등장하는 애나의 의상도 짙고 어두운 가을톤의 색상이다. 안개 때문에 모호하고 흐린 프레임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그들의 상황을 은유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애나'가 좋았다. 김태용 감독이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탕웨이 배우를 염두하였다고 했는데, 그것에 보답이라도 하듯 탕웨이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섬세한 연기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리메이크된 다른 영화와는 달리 '애나'는 굉장히 품위가 있다. 말수가 적고 눈빛은 우수에 차 있다. 많은 말 대신 표정의 미세한 떨림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이것은 훈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애나는 잠깐 들른 휴게소에서 훈의 몫까지 커피를 사 오고는 그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뒤 뜨거운 커피가 급히 움직이는 탓에 흘러넘쳐 손을 다치게 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시선을 급히 돌리며 훈을 찾는다. 말 한마디 없이 불안한 정서를 표현해냈다.
그렇게 헤어진 뒤, 3년이 지나 애나는 퇴소했다. 나중에 이곳에서 꼭 만나기로 했던 훈의 약속을 지키러 애나는 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훈을 기다린다.
그리고, 오랜만이라는 그의 말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났지만, 그들이 만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나를 보며 아무래도 혼잣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훈이의 탑승으로 그 둘이 다시 만나 새로이 관계를 정립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름을 제외하곤 현재의 상황과 전연 다른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소개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장면이 가장 슬펐다. 상대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 나누었던 대화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의 포크를 왜 쓰냐며 울부짖었던 애나. 그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사태의 책임은 지지 않은 채 자신이 영원히 소녀이길 바라며 수감된 동안 다른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사는 그에게 한 번쯤은 퍼부어줘야 했었다.
구월이 되었어도 한낮의 온도는 30도 가까이가 되던 요즘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온도가 떨어져 가을의 느낌이 드는 듯하다. 딱 지금이 만추가 아닐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울적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듯 먹먹했다. 아마 그 둘이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왜 사람들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더 사랑하는 걸까. 이렇게 힘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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