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30. 22:52ㆍFilm
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2022
감독 : 박찬욱
각본 : 정서경, 박찬욱
출연 : 탕웨이, 박해일, 이정현, 고경표, 김신영
줄거리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을 맡게 된 형사 해준은 변사자의 아내인 서래와 마주한다. 그는 남편의 죽음 앞에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아 경찰은 서래를 용의 선상에 올리고 수사를 진행한다.
해준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를 조사하고 주변 인물들과 정황을 탐문하고 잠복수사를 통해 송서래라는 사람을 알아가며 자신도 모르는 사랑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만추>와 <화양연화>를 연달아서 본 이유. 바로 <헤어질 결심> 때문이었다.
영화를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더운 여름 나 혼자. 한 번은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불던 때 연인과.
그것으로도 모자라 난생처음 각본집까지 읽으며 서래에게 헤어 나오지 못했다. <헤어질 결심>을 보고 느낀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워 오래도록 리뷰 쓰는 것을 미루었다.
이제야 밀린 후기를 쓴다.
※ 영화 <헤어질 결심>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후기입니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지금도 서래를 생각하면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린다.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고 속을 알 수 없던 서래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되면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치기 시작했다.
'송서래 당신 장해준을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거야?'
고백하자면 나는 소재에서 거부감을 꽤 느끼는 사람이다. 서래는 배우자가 사망했으니 차치하고, 해준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있을 때 만이라도 뜨거운 음식을 먹이고 싶다면서 피곤한데도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이포까지 달려가 매운탕을 끓여주는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그런 그가 사건의 피의자로 만난 예쁜 중국인 여성을 의심하면서도 사랑한다.
보통의 나라면 그 둘의 관계에 거부감을 느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서래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 때문에 붕괴됐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어에 서툰 그는 사전에 '붕괴'라는 뜻을 검색한다. 그것이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의미임을 알고 서래는 멍해진다. 사랑하는 이가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서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거다.
서래는 해준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범죄를 밝혀냈다며 둘의 관계가 끝났음을 통보하는 순간에도 녹음을 했다. 그리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붕괴됐다는 말을 건너뛰며 끊임없이 녹음본을 듣는다. 해준은 서래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 말한 적이 없다. 결국 해준이가 했던 그 말은 결국 서래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고백하는 것이었으니까.
서래는 이포에서 오랜만에 만난 해준을 몰래 관음 하며 그동안 그의 바뀐 모습을 찾아낸다. 운동화가 아니라 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 그렇게 깔끔하던 사람이 면도를 며칠째 하지 않은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호미산에서 둘이 조우했을 때도 서래는 그의 주머니 속에 어떤 물건이 자리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서래는 세 번의 살인을 했다. 한 번은 힘들어하는 엄마를 편안히 해주기 위한 살인. 자신의 남편이었던 기도수에게서 벗어나고자 저질렀던 살인. 그리고, 장해준을 지키기 위한 살인.
세 번의 살인 중 자신을 위한 살인은 심한 가정폭력을 저지르며 신고하면 중국으로 보내버린다고 협박한 남편을 죽인 것. 단 한 번 뿐이었다.
이미 자신 때문에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친 경찰이 됐다던 해준인데 녹음파일이 공개된다면 그는 더 깊이 붕괴할 테니 서래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서래는 철썩이가 임호신을 죽인 뒤 피를 무서워하는 해준이 걱정돼 깔끔하게 피를 닦아낸다. 그것으로 자신이 또다시 유력 용의자가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서래는 해준이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길 바라서. 미해결 사건을 잊지 못하는 해준이 자신을 평생 기억하기를 바라서 스스로 미결 사건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에 스스로를 버렸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는 해준에게 건전지처럼 자신의 잠을 빼주고 싶다던 서래.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려고 이포에 왔다던 서래.
소재의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둘의 사랑이 몹시 진심이라는 것을 내가 느껴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준보다 서래의 마음을.
해준과 서래는 이상한 중국 요리를 만들어 먹었고 부슬비가 오는 날 고졸한 절에 가서 데이트를 했다. 핸드크림을 대신 발라주며 손을 잡았고 키스 한 번이 전부지만 그 둘은 사랑을 했다. 기도수처럼 이니셜을 새겨 넣지 않았고 임호신처럼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해준은 서래를 사랑했다.
해준과 정안이 관계하는 모습이 에로틱하게 느껴지기보다 타성에 젖은 관계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하는. 습관이 되어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처럼, 그 둘이 나누는 사랑도 그래 보였다. 그런 내 생각을 방증이라도 하듯 해준은 관계 중 다른 생각을 한다. 정안은 이전에도 해준이 그런 적이 있어서 익숙하단 듯이 사건 생각을 하냐 물었지만 글쎄, 아마 송서래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정안의 말처럼 부부끼리 미울 때도 싫을 때도 관계하는 거. 중요하지. 근데 저런 관계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느껴질 정도로 매력 없는 섹스처럼 보였어.
정안은 해준이 이포에 오고 나서 갈수록 수척해진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을 크게 염려했을까. 자신의 잠을 건전지처럼 빼내어서 기꺼이 해준에게 주고 싶었을까. 그가 수염을 매일 밀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이포에 온 뒤로 뛸 일이 없어 운동화 대신 구두를 신고 출근한다는 걸 알았을까. 서래처럼 딱 그 주머니에 립밤이 있다는 걸 알았을까.
서래는 서래의 방식대로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 서래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뱉어내는 말 하나하나에서. 어째선지 해준을 향한 서래의 마음을 전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던 나는 감정이 조절되지 않아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울어버렸다.
서래의 바람대로 그는 해준의 미결 사건이 돼서 단 하루도 그를 잊지 못한 채로 살아가겠지. 서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방식으로 해준을 사랑했다. 속을 잘 알 수 없었던 그였는데, 해준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훤히 들여다 보였다.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멜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잘 보지 않았던 내가 헤어질 결심을 보고 그동안 보지 않았던 멜로 영화를 하나씩 보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는 탕웨이가 되었고, 박찬욱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헤어질 결심이 되었다.
아직 이 영화를 완벽히 이해하기엔 스스로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헤어질 결심 명대사
각본집을 읽어보니 제작 과정에서 편집된 장면들도 눈에 띄었다.
서래가 임호신을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장면.
해준이가 기숙학교에 산다던 아들과 통화하는 장면.
이포에서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가이드를 한다던 서래가 원자력발전소에서 정안을 만나는 장면.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굳이 없어도 되는 부분을 자른 것이긴 하다.
각본집을 보며 내 마음을 움직였던 대사를 모두 기록했다. 내 멋대로 고른 명대사지만, 다른 이의 마음도 울리지 않을까.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해준, 심장이 찌르르.
"내가 할 줄 아는 '단일한' 중국 음식이에요.
- 서래가 사용하는 단어였던 '단일한'을 유일한 대신 사용한 해준.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 서래는 사랑하는 이가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이럴려구 이포에 왔어요? 여기서 죽이면 내가 또 눈감아 줄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남편 몸의 경직을 느끼고 그의 시선을 따르는 정안. 고급옷에 보석을 착용하고 화장한 서래, 해준을 보고 당황하지만 그 부부가 다정한 것을 보고 재빨리 호신의 손 찾아 잡는다.
- 수사 중 해준의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고 빼두었던 기도수와의 결혼반지를 착용했던 서래는 해준과 정안의 다정한 모습을 보자 질세라 호신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아니라.
내 숨소리를 들어요, 내 숨에 당신 숨을 맞춰요."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건전지처럼 내 잠을 빼 주고 싶네요."
"왜 그런 남자하고 결혼했습니까?"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거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농담 안 할 테니까 해준 씨도 솔직히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날 떠난 다음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살아있는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나 짐작이 됩니다.
당신은 내내 편하게 잠을 한숨도 못 잤죠?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죠?
당신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날 밤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다시 사는 것 같았죠?
마침내.
이제 내 손도 충분히 부드럽지요?"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
얼굴 보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살인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산책하고 왔더니 피 냄새가 지독해서 당신 생각났어요. 당신이 와서 이걸 볼 텐데, 당신이 무서워할 텐데."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내가요?"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어요. 그걸 남편이 알아 버렸어요."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재빨리 듣기 싫은 부분 건너뛰고 듣고 싶은 부분으로 바로 간다. 고개 푹 숙이고 눈은 감고 전화기는 귀에 바짝 대고 듣는다.
"......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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