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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할 만큼 노골적인 "디태치먼트(Detachment)" 불편할 만큼 노골적인 "디태치먼트(Detachment)"

불편할 만큼 노골적인 "디태치먼트(Detachment)"

2020. 4. 22. 15:00Film

 

디태치먼트(Detachment)
감독 : 토니 케이
출연 : 에이드리언 브로디, 마샤 게이 하든, 크리스티나 헨드릭스 

 

 

 

영화를 꺼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다. 꾸역꾸역 참아가며 겨우 끝까지 봤다. 100분 내외의 러닝타임 동안 세상 비극적이며 애써 외면하고 싶은 참담한 것들을 다 보여주고 있더라. 조금의 미화나 꾸밈도 없이 오히려 실제보다 더 참혹할지도 모를 이야기들. 보고 싶지 않아서 애써 모른 척하고 피하고 싶은데 억지로 내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하는 느낌이랄까. 영화를 보는 것이 형벌에 가까울 정도로.

 

 

디태치먼트에 나오는 인물들은 주인공인 헨리(에이드리언 브로디)를 포함해서 마음속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이다. 구멍의 크기와 깊이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헨리의 할아버지도 헨리가 만난 에리카도 헨리가 한 달 동안 근무하게 된 공립학교의 학생들도, 교사들도 전부 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헨리는 기간제 교사로 근무한다. 교장선생님과 인터뷰를 할 때 보니 추천서를 많이 받았다는 것 같은데 훌륭한 교사임에도 계속 기간제 교사로만 근무하는 이유는 그가 어딘가에 정착하고 소속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내 마음대로 짐작해버렸다.

 

 

헨리는 할아버지의 사망 후 에리카와의 대화에서 엄마가 7살 때 자살하였다고 했다. 디태치먼트에서는 헨리의 과거. 즉 어머니의 죽음이라든가 하는 부분을 영화 곳곳 플래시백으로 조금씩 살을 덧붙여 보여준다.

 

플래시백 : 영화 등에서, 장면의 순간적인 전환을 반복하는 수법. 사건의 긴박감, 감정의 고조, 과거의 회상 등을 나타내는데 씀.

어머니가 어째서 자살을 선택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7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였다면 감히 짐작하건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아픔과 트라우마일 것이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헨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영화에서 설명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치매를 앓고 있는 듯한 할아버지가 딸이 자살한 공간인 화장실에 집착하고 딸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을 보니 할아버지에게도 딸의 죽음이 극복하지 못한 평생의 가시였음이 분명하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이야기가 있을 거고. 헨리는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았는데도 손주 된 도리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더라. 

 

 

헨리는 눈빛부터 슬프다. 눈빛부터 공허하다. 마음속이 텅텅 빈 것만 같다. 본인 자체가 상처 투성이임에도 남에게 손을 내밀더라. 본인이 지독히도 아팠던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의 방황과 아픔을 쉬이 넘기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난 이런 학생들은 처음 봤네. 위계질서가 철저한 학교 시스템이나 강압적인 교사는 당연히 반대지만, 선생님도 학생도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필요한 법인데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그런 것이 없다. 이 공립학교가 질이 너무 낮다는 소문이 나서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준다면서 연설을 하는 꼴을 보면 그 마을 수준도 알만 한 것 같고.

 

 

아무리 아이들이 나빠도 어른 흉내를 어설프게 내고 있어도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쁜 짓과 나쁜 말을 해도 그래 보았자 아이인 것이다. 무슨 이유로 저렇게 못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헨리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뿔이 잔뜩 난 아이들이 자신을 모욕하건 무례하게 굴건 다그치지 않았다. 한 달간의 기간 후 학교를 떠나는 헨리에게 아이들은 아쉽다고 했다. 다른 선생님들과 헨리는 다르다고 했다. 선생님에게 듀드.라고 하고 f word의 욕도 했던 아이들이.

 

 

 

 

헨리는 버스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에리카를 만났다. 거리에 있는 소녀이다. 하루하루 매춘으로 삶을 연명해가는 소녀. 처음부터 얼마나 무례하게 헨리를 대했는지 모른다. 애써 모른척하고 못 본 척하고 자기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헨리는 기어코 에리카를 자기 삶으로 끌여들였다. 그녀를 도왔다. 그게 아주 최소한의 것이었어도.

 

 

 

헨리는 에리카를 집으로 들여 샌드위치를 내주었다. 에리카의 상처를 보고 최근에 나쁜 일을 당했냐고 물어봐 주었다. 에리카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깨끗한 수건을 건네주며 샤워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때 에리카는 헨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thanks라는 아주 짧은 한 마디의 말이었지만 제멋대로에다가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소녀가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냥 10대 소녀일 뿐이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10대 소녀. 귀여운 소녀.

 

 

 

메레디스가 헨리에게 호감을 가진 이유도 에리카와 같을 것이다. 헨리는 메레디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만 그것이 깊은 것은 아니었고 학교 선생님이 제자에게 내밀 수 있는 수준의 호의였지만. 메레디스에겐 그것 조차 너무 귀하고 소중해서 다르게 다가왔었나봐.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메레디스는 소속되지 못했던 듯하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레즈비언이라 놀렸고 집에서는 살 좀 빼라며 아우성이었다. 메레디스가 학교 화장실에서 햄버거를 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메레디스는 햄버거 하나 맘 놓고 먹지 못했던 것이다. 햄버거를 먹는 자신을 보고 또 뭐라고 할 친구들이 두려웠던 것이겠지.

 

 

 

모두 다 괜찮을 거라고. 그냥 한 번 안아주는 게 그렇게 힘들었을까. 선생님과 제자가 포옹하는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둘의 이런 모습을 목격한 동료 교사가 아이를 성추행한 것이냐며 헨리를 몰아붙였다. 굉장히 억지 설정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헨리가 감정적이 돼서 폭발한 모습을 담아야 했으므로 필요한 전개라는 생각이 들더라. 기어코 헨리는 메레디스를 안아주지 않았다. 이 사건 때문이었던지 에리카를 보호 단체로 보내기도 했고 말이다.

 

 

 

자신을 유일하게 들여다 봐주던. 있는그대로 대해주던.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존재에게 거부당했던 것이 메레디스를 살고 싶지 않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그런 호의조차 없었다면 메레디스가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에리카도 메레디스도 금세 헨리에게 마음을 열었다. 아이들이 너무 상처 받았고 누가 손 내밀어 준 적이 없어서. 진심으로 자신들을 헤아려준 적이 없어서 작은 호의에도 쉽게 사랑에 빠져버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단지 교사로서. 단지 사회의 기성세대인 어른으로서. 딱 그만큼의 호의였는데도.

 

 

 

메레디스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헨리의 마음을 변화시켰는지 헨리는 에리카를 찾아갔다. 

 

 

영화 이름의 Detachment는 무심하다는 뜻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헨리도, 에리카도, 메레디스도.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과 타인을 디테치먼트 해온 사람들이다. 

 

 

헨리는 모든 일들을 겪고도 꽤나 잘 자란 어른인 것이다. 이 영화 불필요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보여줬단 말이다. 7살 아이의 눈에 비친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나체로 사망한 모습을 관객들에게 그대로 보여주었다. 어떻게든 아이의 눈을 가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헨리의 할아버지가 있었던 병원에서 왜 옆방에 있던 할머니의 알몸은 전부 보여준 것일까. 속옷을 입지 않고 다니는 아이에게 성병에 걸렸다는 부위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도 보여주었다. 다 뜻이 있었겠지만,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아마 난 두 번 다시 이 영화를 들여다보지 않을 것 같다. 한 번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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