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5. 11:00ㆍBook
소설가로 산다는 것
김훈 외 지음
※ 지극히 사적이며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얼마 전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을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소설가로 산다는 것에도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이 책은 그동안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됐던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작가의 창작 노트를 한데 모은 것이다.
김경욱 작가, 김애란 작가, 김연수 작가, 김인숙 작가, 김종광 작가, 김훈 작가, 박민규 작가, 서하진 작가, 심윤경 작가, 윤성희 작가, 윤영수 작가, 이순원 작가, 이혜경 작가, 전경린 작가, 하성란 작가, 한창훈 작가, 함정임 작가까지 총 17명의 작가의 글이 실려 있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작가들도 있다. 짤막한 글을 보고 반하게 되어 나중에 읽어보려고 그들의 대표 작품을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 요즘에 우리나라 작가들 책을 많이 보고 있는데 정말 좋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훌륭한 작품을 많이 써냄에도 해외 유수한 상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지 못하는 건 우리나라 말이 너무 심오하고 유려하여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기에 어려움이 많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어로 쓰인 감각적이고 섬세한 표현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어서. 요즘에 서사도 서사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심취하고 있는데 우리 작가들 문장을 너무 잘 쓴다. 경이롭다.
열일곱 작가의 글 중에서 내가 깊이 감응하였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당연히 먼저 우리 김애란 작가의 "여름의 풍속"
내가 처음으로 김애란 작가를 만난 것은 "비행운"이었다. 신인으로서 김애란 작가에 견주는 작가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나는 그녀의 작품을 읽으며 '어떻게 이렇게 문장이 술술 읽힐 수 있지?' 하며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던 것이 기억난다. 비행운을 시작으로 난 김애란 작가가 출간하는 소설을 모두 읽었다.
짧은 에세이 형식의 "여름의 풍속"을 읽으며 첫 문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역시 김애란 작가의 글은 하나의 막힘도 없이 술술 읽혀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쉽게 읽혀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문장이 간결하여 속도감 있게 읽혀도 글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더라. 여름의 풍속은 김애란 작가가 대학생 시절 선배와 함께 헌책방에 갔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언어 학사>라는 듣기만 해도 어려울 것 같은 책 때문인데, 우연히 헌책방에서 언어 학사라는 책을 발견해 구입하였고 오랫동안 버리지 않은 이유는 책을 보지 않아서 좋은 책인지 나쁜 책인지 알 수 없어서란다. 새침하고 적당히 잇속을 차리던 어린 날의 김애란 작가를 보는 재미가 좋더라.
새삼스럽게 <언어 학사>라는 그 책 안에 있던 전 주인들의 이름들, 그리고 그들의 수강 신청 표로 그 많은 것을 유추해 내는 김애란 작가가 신기했다. 작가라 함은 타인의 삶을 그려내는 자들이니 아주 조그만 단서를 갖고도 오만가지로 인생의 곡진함을 유추할 수 있나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내심 아쉬웠다. 그 옛날 90학번, 92학번이던 아무래도 고대 씨씨였을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거든. 허나 그대로 덮어두는 것도 좋다. 김애란 작가는 오래전 어느 뜨거운 여름날의 기억으로도 이만큼의 글을 써낼 수 있는 것이다. 작가들은 일상에서 영감을 얻고 모든 것이 글감이라 하였는데 '소설가로 산다는 것'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였다.
두 번째로 윤영수 작가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그러나 팔자에 없는"
아무래도 유추해 보건대 혜화동 주민인 듯한 윤영수 작가가 길음동에 사는 선배 언니를 만나러 가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어느 날에서도 작가들은 글감을 얻나 보다. 우리나라는 남의 집에 방문할 때 빈 손으로 가는 게 죄악시되는데, 무엇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하는 윤영수 작가가 어쩌다 보니 여러 가지의 이유로 아파트에 들어설 때까지 마땅한 것을 사지 못해서 결국 빈손으로 선배 집에 방문하게 되는 이야기다.
작가들은 퍽이나 솔직하다. 은유 작가도 내 맘이 아닌 글, 진심으로 쓰여지지 않은 글을 가장 경계하는데, 작가들의 에세이를 보면 서슴없이 자신의 어릴 적 일화나 본인의 가치관, 정치색까지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윤영수 작가도 그렇다. 엄마와 아빠의 성격을 어릴 적 일화를 통해 간략하게 언급하였고 윤영수 작가 안에 발랄한 어머니와 진중한 아버지가 교차로 드러내는 것을 표현한 것이 재밌다.
어릴 적 읽을 것이 귀했던 시절 명리학 서적까지 섭렵해 자신의 사주팔자를 어느 정도 알았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점집을 가서 본인의 점을 보면서 친구인 윤영수 작가의 사주까지 보았단다. 윤영수 작가는 친구가 자신이 명리학 책에서 보았던 팔자와 비슷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점쟁이들도 결국 책을 보고 말하는구나"했다고. 맞다. 고작 명리학을 기반으로한 8개의 글자로 감히 한 인간의 서사와 인생을 모두 다 담아낼 수 없다. 더 말하고 싶지만 말이 길어질 것 같아 그만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단을 소개해드리자면
다른 이에게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놓는다 해서 소설 쓰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음은 선배도 나도 너무나 잘 안다. 어차피 혼자만의 작업이다. 혼자만의 체력으로 혼자만의 역기를 들었다가 얌전히 다치지 않게 내려놓는 것만이 작가의 할 일인 것이다.
소설 쓰는 것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인생사가 결국 혼자만의 체력으로 혼자만의 역기를 들었다가 내려놓는 일의 무한 반복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순원 작가의 "삼백 년 전 소년이 그려낸 '은비령'"
마치 자전적 소설 같은 느낌이었다. 이순원 작가는 1957년 강원도 강릉의 시골 마을에서 출생한 모양인데 어릴 적 이야기를 보니 마치 구한말 때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100년도 더 된 책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일들. 지금은 서울이든 산골 마을이든 정보의 격차가 없는 시대이다. 파리에서 발표한 컬렉션이 서울에서도 동시에 공개 되는 시대이니 시간의 격차가 없다. 시골 사람이 촌스럽다는 것도 옛 말일 것이다. 굳이 파리에 가지 않아도 오늘날 파리에서 유행하는 아이템을 산골 마을에서도 볼 수 있는 시대이니.
이순원 작가의 유년시절은 지금 같은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울과 시골의 격차가 퍽이나 심했던 모양이다. 어른이 되어서 훨씬 윗세대의 어른과 대화를 나누면 본인을 아주 신기해 하셨단다. 그 어른은 서울서 자라 20살 때 전기가 들어왔고 1930년대에 서울역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드시던 분이어서 어떻게 나보다 어린것이 자기보다 더 옛날 얘기를 한다고 하셨다고. 그런 이순원 작가가 강릉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눈에 보이는 모든것이 얼마나 별천지 같았을지.
마지막으로 이번엔 이순원 작가에게 동의할 수 없었던 문단을 소개해드리며 포스팅을 마치려고 한다.
살아가면서 작가가 되어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예를 들어 고시공부 하시는 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이 년 만에, 삼 년 만에 됐다고 하면, 오 년 만에 된 사람은 이 년 만에 된 사람에 비해서 삼 년이나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면 그것은 좀 시간의 낭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가한테는 자신의 어떤 시간도 다 소중해요. 제가 어릴 때 농사를 지으러 대관령에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학문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 시기가 이 년만큼의 공백 기간일 수 있겠지요. 그때 대관령에 올라가지 않고 제대로 공부를 해서 제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도 일찍 들어가 계속 공부를 했다면 그 시간만큼 학문도 깊어질 수 있었겠지요. 이렇듯 작가에게는 지난 어떤 시절도 그의 경험 안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소중한 시간들인 것입니다. 부끄러웠던 대로 제 마음속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고요.
이순원 작가는 고시 시험에 합격한 이야기를 통해 2년 만에 합격한 사람과 5년 만에 합격한 사람을 예로 들었다. 5년 만에 합격한 사람은 2년 만에 합격한 사람보다 3년의 시간을 더 쓴 것이고, 시간의 낭비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였지만 이 부분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 5년 만에 합격한 사람이 3년의 시간을 더 썼다고 해도 부수적인 기간 동안 그가 얻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난 이제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도 반드시 배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5년을 공부해서 합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의미가 있는 일이다. 5년 동안 무엇인가를 위해 맹목적으로 노력한 그 힘으로 다른 무언가를 또다시 할 수 있을 테고, 그 곡진한 노력으로 얻게 될 유수한 인생의 경험이 반드시 있을 터이니.
내가 고작 이만큼 살아놓고 하는 말치곤 우스우나,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일은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시간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더라. 비단 작가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모든 경험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귀하고 소중한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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