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2. 00:31ㆍBook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하현 지음
※ 지극히 주관적이며 일기 같은 리뷰입니다.
하현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그를 이제야 알았는데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정보로 유추하건대 내 또래고 몇 편의 책을 출판한 경험이 있는 작가더라. 어젯밤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몇 페이지를 재미 삼아 읽을 요량이었는데 새벽 늦게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다. 꾸밈없고 소소하며 솔직한 그의 필체가 좋더라.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는 하현 작가가 우연한 기회로 뜬금없이 스페인어를 배우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과정 중에서 그가 느꼈던 것, 사유했던 것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올 초에 어떤 칼럼에서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새해의 계획을 짜는데 사실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다 똑같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중에서도 꼭 들어가는 것이 바로 "외국어 공부하기"라고 하더라. 난 내 모국어인 한국어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어나 스페인어 혹은 중국어처럼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고 그렇게 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보니, 우리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말을 익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듯 하다. 그는 홍대에서 혹시나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서 쭈뼛한 상황을 넘길 수 있는지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였는데, 사실 한국에서 한국인이 영어를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쭈뼛거리거나 죄스러울 일이 아니다. 헌데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가 세계 어디에서든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타국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모국어로 길을 묻는다는 건 얼마나 자신의 언어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것인지. 만약 우리가 타국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한국어로 길을 물으면 우리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스페인어를 공부한 것도 그렇게 시작을 한 것이었다. 프리랜서 작가로서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크게 부담이 없고 영어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스페인어를 학습한 것은 '이 정도면 할만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던 모양이다. 이 책은 그녀가 스페인어 강의를 수강하면서 배웠던 것들을 자잘하게 소개한다. 새삼스럽게 작가들은 언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근사한 에세이를 써낼 수 있는 거구나하고 감탄하였다. 부럽다. 나도 내가 언어 배우는 걸 주제로 한 번 습작이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그녀가 스페인어를 배운 것에 특별한 목적의식이 있지는 않았다. 다른 학생들처럼 스페인 여행을 간다든가 아니면 스페인으로 어학연수를 간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만 살 것이고 직업적으로도 필요한 게 아니라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외국어를 학습하는 일은 굉장히 고되고 지루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나 되는 홍대를 왔다 갔다 하기 무척이나 지쳤을 텐데 그 과정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녀의 뻔하지 않은 결말도 맘에 들었다. 난 교훈적이 이야기를 싫어하는데 만약 책의 결말이 "그래서 나는 스페인어를 끈덕지게 공부해서 스페인어 고급 자격증을 취득했다."라든가 아니면 "그래서 난 부푼 꿈을 안고 스페인행 비행기에 올라탔다."라든가 아니면 "열심히 공부한 보람으로 이제 스페인어 영화는 자막 없이 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가 아니어서 좋았다. 뜨뜻미지근한 책의 결말에 그가 아쉬워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오히려 더 좋더라. 인간미 있고. 우리네 삶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꼭 대단한 결말이어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예전에 스페인어를 공부했던 적이 있다.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나서 왜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친구들이 내 이름을 독특하게 불렀는지. 그리고 왜 호텔을 오뗄로 발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스페인어는 된소리가 많다. 그리고 영어와 달리 한 음절당 한 개의 소리만 갖고 있다. 우리 한글처럼. 해서 스페인어로 쓰인 글을 보면 스페인어 초급의 실력이어도 뜻은 모를지언정 읽을 줄은 안다. 내가 그랬다. 그리고 또 독특한 점. 스페인어엔 rrrrrrrrr발음이 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호루라기 불 때 ㄹㄹㄹㄹㄹㄹ 하는 소리라고 하면 아시려나. 난 이 발음을 하지 못한다. 내가 다른 친구들한테 이 발음을 해 보라고 했을 때 다들 어렵지 않게 하더라. 인니어에도 rrrrrrrr발음이 있어서 정말 짜증이 났다. 네이티브인 사람도 선천적으로 저 발음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데 내가 꼭 그 짝이다. 저 발음이 안 되면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꼭 숙지해야만 하는 발음인데 난 결국 안 되더라고. 안 되는 걸 뭐 별 수 있나. 하현 작가도 나와 같았던 듯하다. 선천적으로 도저히 rrrrr이 발음되지 않는 학생. 그래도 고급반까지 꾸준히 공부했으니 정말이지 대단하다. 내 스페인어 공부는 한동안 꾸준히 공부하다가 접어버렸고 그 이후에 despacito가 히트할 즈음 스페인어의 아름다움에 다시 한번 매료되어 공부를 할까 하였으나 역시나 관두었다. 한국에 사는 나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스페인어보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익히는 것이 훨씬 현실적으로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를 읽고 다시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말이다.
난 큰 노력 없이(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어쩌면 굉장히 노력하였을) 체화한 내 모국어의 문법을 따로 배우지 않았다. 사실 세상에 쉬운 언어는 없겠지만 스페인어는 영어에 비해 동사 변형이 굉장히 불규칙하고 시제는 더 복잡하다. 도대체 그걸 하나하나 언제 다 외우란 말이야. 하현 작가 역시 스페인어를 배울 때의 고충을 솔직하게 적어냈더라. 말이 먼저고 글이 다음인데 우린 항상 말보다 글을 배우려고 하니 너무 어려운 것 같아. 엄청나게 골머리를 쌓았을 흔적들을 보는 재미가 좋았다. 작가의 심정이 이해가 되고 스페인어를 하겠다고 강의를 듣던 나도 생각이 나고. 역시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
난 책을 읽으면서 하현 작가에게 공감을 많이 하였는데 그중 가장 공감 가던 부분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나 역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말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만 못 따라가는 느낌을 받을 때의 그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살면서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해보았다. 다른 친구들은 잘 따라 가는데 나만 갈피를 못 잡는 느낌. 의기소침해지고 작아지는 느낌.
그는 초등학교 때의 한 일화를 소개했다. 퀴즈를 내고 문제를 맞히면 사탕이나 캐러멜 같은 달다구리를 주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집에 가면 널린 게 과자지만 왜 때문인지 교실에서 합법적으로 먹는 그 맛이 너무나도 좋았다고. 마침 포도맛 젤리를 주려는 선생님에게 정답이 뭔지도 모르면서 손을 들었는데 그 선생님이 그를 지목했다고 한다. 그는 당황해서 "정답은 모르는데요."라고 했더니 그 선생님이 표정을 싹 굳히며 "모르면 손 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했다더라. 요즘엔 이런 선생이 없을 거라고 믿고 싶다. 좀처럼 수업 시간에 입 하나 안 열고, 말이라도 하면 말대꾸한다는 소리를 듣고, 모르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그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던가. 정답을 모르는데 손을 들은 것이 초등학생 아이에게 정색하면서 왜 알지도 못 하면서 손을 드냐고 모르면 가만히나 있으라고 면박을 줄 일인가. 괜히 내가 화가 나지 뭐야. 어른이면 어른다워야지. 선생님이면 선생님다워야지. 나이만 처먹는다고 어른이고, 애들 가르친다고 다 선생인가. 어렸을 때의 경험은 같잖은 거여도 그 사람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별 것도 아닌 경험이 다 큰 성인이 돼서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때문에 입을 닫아버리게 만든 것이다. 나 역시 그 생각을 평소에 하고 사는 사람이며 어디에서든 좀처럼 내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틀릴 수도 있는 건데 '틀리면 가만히나 있지.'라는 말을 하는 그놈의 고약한 인식 때문이다. 하현 작가는 스페인어 수업을 듣다가 오래전 초등학생 때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희미해지고 흐릿해졌다고 하더라도 유년 시절에 겪은 수치스러움은 성인이 되어서도 쉬이 잊기가 힘들다. 나 역시 그러니까. 정말이지 아이에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참을 수 없다.
하현 작가가 세심하고 섬세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학원을 꼬박꼬박 가면서 오전반에 있을 때와 오후반에 있을 때의 다름을 서술했다. 두 반의 분위기가 왜 다른지에 대해 그는 좀 늦게 알아버렸다. 이미 하루의 기운을 다 소진해버리고 그럼에도 자기 계발을 하겠다고 영어도 아닌 제2 외국어를 배워보겠다고 퇴근 후 강의실에 앉아있었을 그들이 왜 웃음이 없었는지, 왜 말이 없었는지, 왜 소소한 대화도 하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곧장 가 뻗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뒤로하고, 하나라도 더 배워보겠다고 죽을상으로 학원으로 향하는 그 심정을 알고 있다. 나 역시 어학원에서 오후 수업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끼리 눈인사 따위도 없다. 수업이나 듣고 가면 그만인 것이다. 금요일에도 출석하는 나에게 강사는 "금요일인데 안 놀고 왜 수업 들으러 왔어요? 안 놀아요? 왜? 금요일은 당연히 빠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진짜 신기해. 나 같으면 절대 안 나왔을 텐데. 너무 열심히 사시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였다. 난 주로 강남역에 있는 학원을 다녔다. 놀 곳이 천지인 강남역에서 금요일'조차' 빠지지 않고 수업을 들었던 난 강사에게도 진기해 보이는 꽤나 성실한 학생이었던 모양이다. 하하. 일상이 고되고 예복습을 충분히 하지 못해서 그다지 중국어 실력이 늘은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하현 작가는 평일 낮의 홍대와 밤의 홍대, 그리고 주말의 홍대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더라. 그냥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것들도 작가들 눈에는 저리 다르고 특별하게 보이나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별 것 없는 소소한 날들에도 작가들은 글감을 찾고 영감을 받는구나 하고 말이다. 나도 별 것 아닌 것을 내 일상과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글로 풀어내는 연습을 조금씩 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 책 한 권만으로 그녀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전에 출판한 그녀의 다른 책도 이미 읽고 있는 중이다.
여담으로, 하현 작가의 외자 이름이 참 이쁜데 왜 이름을 바꾸려고 하시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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