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22. 00:14ㆍBook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지음
※ 개인적인 서평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글쓰기 책을 읽으면서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들 하시는지. 나중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아마 작법서의 끝판왕이지 않을까. 아껴두다가 드디어 읽었다. 종류 불문하고 모든 작가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이라고 하면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 주로 SF나 호러 장르의 문학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화되거나 드라마화된 작품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샤이닝> <미저리> <쇼생크 탈출> <그것>등이 있다. 여기서 내가 본 것은 샤이닝뿐이지만 다른 작품이 워낙 유명해서 눈에 많이 익은 작품. 그만큼 스티븐 킹이 유명하다는 것이겠지.
유혹하는 글쓰기는 작법서다. 소설 작법서. 전문 작가 지망생들에게 어떻게 글 쓰기를 할 수 있는지를 소개한 책이다. 스티븐 킹은 초반부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력서라는 제목 아래 서술해놓았다. 순탄한 유년시절이 아니어서 새삼 놀랐는데 하다못해 아주 어릴 때 유모한테까지 학대를 당했더라. 불행한 삶은 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고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티븐 킹은 꽃길만 걸은 예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그런 유수의 작품을 써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 부분을 읽다가 갑자기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은유 작가가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겪은 일을 담은 에세이)이 생각이 났는데, 고난이 많은 인생을 산 인물일수록 공감능력이 뛰어나다고 했고 글도 더 잘 쓴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가도만 달려온 인물은 남의 글에 쉬이 공감하기도 어려워하였으며 마찬가지로 글 솜씨도 평범했고 타인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내는 것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이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그가 학교에서 처음으로 소설을 만들어 팔았을 때 학교 선생님에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 하현 작가의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리뷰를 하면서 어릴 때 선생님이 생각 없이 내뱉은 소리가 아이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적어놓은 글이 있는데 이 일화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쓰는 작품들을 부끄러워하면서 꽤 오랜(너무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시든 소설이든 단 한 줄이라도 발표한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하늘이 주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듣게 마련이라는 것을 내가 비로소 깨달은 것은 아마 마흔 살 때였던 것 같다.
왜 재능을 낭비하느냐, 왜 시간을 낭비하느냐, 왜 쓰레기 같은 글을 쓰냐고 따져 묻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마흔 살 때라도 알았기에 다행이지만 얼마나 많은 기간 동안 훌륭한 작품을 써냄에도 스스로를 평가 절하하며 지내왔을까. 내가 다 분했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사람들이 제발 없어지기를.
작법서이지만 특별한 방법을 일러주지는 않는다. 다른 작법서와 비슷한 말을 하는데, 이건 글을 쓰고 소설을 쓰는 데에 있어 요행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일 거다.(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당연히 책을 많이 읽을 것, 많이 쓸 것, 부사를 생략할 것, 독자가 속도감 있게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쓸 것, 문법에 주의할 것, 어휘량을 늘릴 것, 그리고 진실될 것. 진실된 글을 쓰라는 것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어떤 설명을 하든 간에 맥락의 끝에는 꼭 거짓 없는 진실한 글을 쓰라고 당부하였으니까.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말 뭐든지 좋다. 단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자기가 잘 알고 또 좋아하는 소재를 회피하고 친구나 친척이나 문단 동료들이 좋아할 것 같은 소재를 택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큰 잘못이다. 그리고 돈을 벌겠다는 목적으로 일부러 특정 장르나 소설 유형을 선택하는 것도 역시 심각한 잘못이다. 우선 도의에 맞지 않는다. 소설의 소망은 거짓의 거미줄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지 돈벌이를 위해 지적인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글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 잘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 타인의 취향에 맞추거나 혹은 돈이 되는 글(결국 같은 말이다. 대중이 좋아하는 글=돈이 되는 글이니까)을 쓰는 사람들에게 거짓의 글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일갈하였다. 솔직히 이 부분에선 공감하기가 어렵다. 글이라는 것도 결국 대중이 읽어줘야 글이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만 썼다가 대중의 외면을 받는다면 그건 글이 아니라 나 혼자 써 내려간 일기와 전혀 다를 것이 없으니까. 하이 브랜드의 대표 디자이너일지라도 당연히 대중을 염두하며 디자인을 한다. 팔리는 옷, 팔리는 제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럭셔리 브랜드의 중국 고객이 늘어남으로써 로고 플레이가 더 유행하게 됐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이다. 결국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자신이 만들고 싶은 디자인보다 당연히 대중의 선호를 따를 수밖에 없다. 곡을 만드는 작곡가도 그렇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음악보다 대중이 좋아할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들을 테니까. 혼자 입을 옷, 혼자 들을 음악, 혼자 읽을 책 쓰는 거 아니잖아. 덧붙이자면, "돈"이라는 게 관련된다고 해서 진심과 열정이 희석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언젠가 윤여정 선생님이 출연하신 방송을 보았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긴 연기 인생 동안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던 것은 돈이었다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계. 예를 들면 집에 무언가가 고장 나서 수리비가 당장 필요할 때. 스티븐 킹은 모두가 알다시피 웅장한 서사를 집필하는 작가고 역량이 매우 뛰어난 작가다. 그는 운 좋게도 자신이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분야와 대중의 취향이 맞아떨어졌지만, 대중의 취향과 방향을 달리 하는 작가가 무조건 고집을 부려 본인이 잘 알고, 잘 쓰는 분야만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닌 차선의 분야를 선택했는데 오히려 더 큰 대중의 사랑을 받는 대단한 글이 나올지 모를 일이니까.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한 우물만 파는 건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다. 이런 맥락의 글은 여태껏 리뷰를 하면서 많이 써왔기 때문에 내 서평을 꾸준히 봐오신 분들은 익숙하실 거다.
스티븐 킹은 글을 쓸 때 "뮤즈"에 대해 언급하였다. 매일 같은 공간 일정한 분량을 정해놓고 세상의 모든 세속적인 것과 차단되어 글을 썼다고 했다. 트루먼 카포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트루먼 카포티는 영화화된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집필한 유명한 영미 문학가로 소설을 집필할 때 모텔에서 작업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이 일화도 얼마나 유명한지 조정래 작가가 아들 내외에게 태백산맥 필사를 시키셨다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이야기하던지) 스티븐 킹은 서재에서 그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즉, 글은 그냥 써지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저렇게 대단한 문호도 지독하게 고민하고 낱말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며 창작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려고. 그 "뮤즈"라는 것은 수시로 나타나 술술 일필휘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일러주려고.
이번에는 스티븐 킹이 다른 작법서와 다른 이야기 한 것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바로 플롯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플롯에서 태어난 이야기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게 마련이다. 나는 플롯보다 직관에 많이 의존하는 편인데 그것은 내 작품들이 대게 줄거리보다는 상황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덕분이기도 하다.
그럴듯한 어떤 상황만 있으면 플롯 따위는 의미를 잃고 만다.
여러 작법서를 읽어 보았지만 작가들마다 이야기를 달리한다. 어떤 작가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인물 묘사를 지나치게라도 많이 해야 한다는 작가도 있었다. 반면 스티븐 킹은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가둘 수 있으니 지나친 인물 묘사는 삼가야 한다고 일침 했다. 어떤 작가들은 아예 플롯을 머릿속에 구상하고 글을 써내려 가야 한다고 했는데 스티븐 킹은 플롯이 아니라 상황을 주고 소설을 집필하기 때문에 서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작가인 본인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작법에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독자 입장에서 상황만 주고 인물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보는 입장으로 소설을 집필한다는 스티븐 킹의 이야기가 훨씬 매혹적으로 들렸다.
빼어난 스토리와 빼어난 문장력에 매료되는 것은(아니,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은) 모두 작가의 성장 과정에 필수적이다. 한 번쯤 남의 글을 읽고 매료되지 못한 작가는 자기 글로 남들을 매료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난 문장보다 서사를 탐하는 사람이지만 요즘엔 서사만큼이나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안다. 글뿐인데도 눈에 훤히 보이게끔 묘사해 놓은 상황과, 대화를 통한 인물의 심리를 들여다보며 탄복한다. 이 문장을 인용한 이유는 유시민 작가의 "공감 필법"에서도 결이 같은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남의 글을 읽고 공감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글로도 남을 공감하게 할 수도 없다는 말. 내가 매료돼야 남에게도 매료되게 할 수 있다는 말.
얼마 전 읽은 이세훈 작가의 "선택적 필사의 힘"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한 번도 남의 글을 필사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글도 쓸 수 없다는 말을. 미국의 대문호인 스티븐 킹 본인도 어렸을 때 필사로 실력을 키웠다고 고백하였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장르의 글쓰기 책을 보았는데 이구동성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뻔한 이야기인 "많이 읽고 많이 쓸 것." 스티븐 킹은 독서를 하지 않으면서 남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였다. 깊이 공감한다. 세상엔 뿌린 만큼 거둘 수 없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알지만, 뿌리지도 않으면 거둘 것도 없잖아.
마지막으로 유혹하는 글쓰기의 마지막 챕터인 인생론에서 가장 좋았던 문단을 소개해드리며 서평을 마치려고 한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 준다. 글쓰기의 목적을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여러분도 해야 한다는, 그리고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여러분도 해내게 될 것이라는 나의 장담이다.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도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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