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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장" - 자주 옅게 슬펐던 범속한 이야기 영화 "이장" - 자주 옅게 슬펐던 범속한 이야기

영화 "이장" - 자주 옅게 슬펐던 범속한 이야기

2020. 5. 23. 02:48Film

이장 (Move the grave) 2020
감독 : 정승오
각본 : 정승오
출연 : 장리우, 이선희, 공민정, 윤금선아, 곽민규, 강민준, 송희준

 

 

영화를 보며 자주 옅게 슬펐다. 맘 속에서 무언지 모르겠는 무언가가 꾸역꾸역 올라와 자꾸만 울컥했다. 너무 범속한 이야기라 공포스럽단 느낌도 받았다. 영화 "이장"은 예사로운 이야기다. 소소한 일상을 다룬 이야기도, 낭만을 그린 이야기도, 무구한 이야기도, 스펙터클한 이야기도 아니다. 구질구질하고 속된 삶 그 자체다.

 

 

독립영화여서 그런지 전부 다 처음 보는 배우였다. 평범한 외모의 배우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주얼의 배우들 열연에 더욱더 현실같이 느껴졌다고 할까. 한 시간 사십 분 정도의 러닝타임 동안 터부시 되는 한국의 가부장제에 대해 정확히 꼬집었다. 

 

 

얼마 전에 읽은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에 수록된 강화길 작가의 '음복"이 생각났다. 제사는 철저히 남성들에 의해 진행되는 문화이지만, 제사를 지내는데 필요한 육체노동과 감정 노동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었던 것이 영화 이장을 보며 다시금 사무쳤다. 정승오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는데, 어렸을 때 이러한 세태가 의아하다고 느꼈다고 하더라. 그의 경험들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던 모양이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우리도 자식이에요. 장남 타령 좀 그만 하세요. 좀!"


왼쪽부터 넷째 혜연, 첫째 혜영, 셋째 금희, 둘째 금옥

영화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문제로 자매들이 모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딸이 넷에 아들 하나인데 아마 아들을 낳으려고 자식을 계속 낳은 모양이다.

 

 

장녀인 혜영은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 동민을 혼자 키우고 있다. 그 아들이 짱구보다 더 심한 말썽꾸러기인데 굉장히 속을 썩인다. 그나마 월급이 높은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육아 휴직을 하겠다고 하니 회사에선 휴직 후 사직하는 것을 권유했다. 둘째인 금옥은 남편이 돈은 잘 버는 것 같았는데 외도 중이다. 금옥은 알고 있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하며 자료를 야금야금 모으는 중이다. 셋째 금희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금희도 결혼할 남편도 돈이 넉넉지 않은 것 같더라. 넷째인 혜연은 학교를 오랫동안 다니는 중인데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가장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캐릭터로 이 영화에서 사이다 역할이다.

 

 

막내인 승락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넷이서 큰아버지댁에 간다. 승락과 연락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는데 큰 아버지는 "어디 장남도 없이 무덤을 파냐. 당장 데려와!"라고 호통을 친다. 넷째인 혜연은 "우리도 자식이에요. 큰아빠. 장남 타령 좀 그만 하세요. 좀!"이라고 말한다.

결국 큰 소리가 났고 큰아버진 애꿎은 항아리를 깼다. 혜연은 "대대손손 망나니예요?" 하는 걸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도 비슷한 행동을 하셨던 모양이다. 영화 곳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짐작하건대 돌아가신 아버지는 결코 좋은 분이 아니셨다. 장녀 혜영이 (아버지가) 죽어서도 우리를 괴롭힌다고 했고, 넷째 혜연은 돌아가신 엄마가 아버지와 같이 묻히지 않으려고 화장을 고집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막내아들 승락은 아직 자리잡지 못한 듯 보였다. 돈이 필요할 때만 누나들에게 연락하고, 잠수 타고.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날까지 잠수를 타서 누나들이 승락의 집 주소를 인스타에서 전 여자 친구를 통해 겨우 알아내야 했다. 집 앞에 누나들이 찾아와도 문을 열지 않자 골이난 큰누나는 창문을 발로 깨버렸다.

 

 

 

 

감정 노동도 오롯이 누나들의 몫


승락이 얼마나 무책임한 종자인지를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서도 승락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누나들의 몫이었다. 승락의 임신한 여자 친구를 달래는 것도, 공감해주는 것도, 그녀가 정신적 신체적 비용으로 요구한 오백만 원을 지불하는 것도.

 

 

다 같이 식사를 하는 도중 술을 마시겠다는 승락의 여자 친구에게 임신했냐고 넌지시 묻는 큰어머니의 주의를 돌리려 분위기를 얼른 살피고 애써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며 눈치 보고 노력하는 것조차 누나들의 몫이었다. 승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 집에 가서도 승락은 가장 살이 많은 닭다리를 차지했고 술도 마찬가지였다. 큰아버지는 유일한 아들인 승락에게 아버지를 화장하는 건 아니지 않냐며 누나들을 설득해달라 부탁했다. 갑자기 승락이 뜬금없이 누나들에게 "근데, 아버지 꼭 화장해야 해? 아버지는 땅에 묻히고 싶다고 하셨잖아."라고 하는데 내가 입을 틀어막고 싶더라. 이미 얘기가 끝난 문제고,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날에도 잠수 타고 나타나지도 않던 놈이 이제 와서 장남 된 자격으로 말할 자격이 있다는 거야? 답답스러워서 정말.

 

 

"계집애들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집구석에서 살림만 하는 게. 그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큰아버지의 말을 듣고 큰아버지를 무서워해서 전화로도 벌벌 떨던 둘째 금옥은 그릇을 집어던졌다. 

 

 

 

 

고상하지 않은 전쟁 같은 삶


셋째인 금희가 결혼을 앞둔 남자 친구와 영상 통화하는 씬에서 그 남자 친구의 말이 너무나 가관이지 뭐야.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드는 거 아니냐며 부모님 생신과 명절 선물 비용은 없애자고 했다. 그래 그것까진 좋아. 근데 그다음 생필품으로 들어가는 비용은 자기가 부모님 집에서 가져오면 되니까 그 비용도 없앨 수 있다고 했다.

 

 

도대체 부모님 집에서 치약, 칫솔 훔쳐와서 얼마나 아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며, 상식적으로 부모님 집에서 생필품을 갖고 온다는 게 말이나 되는 발상일까. 남자 친구 말에 혜영은 그러면 화장품이나 생리대 등 자신한테만 드는 비용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금희는 돈 문제가 급하다. 결혼 때문에 돈 들어갈 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며 업체한테 받을 수 있는 돈은 500만 원뿐이지만, 다섯이 똑같이 나눠가지지 않고 자신이 다 가져가길 바라는 이유다.

 

 

 

 

큰아버지의 진심


큰아버지는 옛날 분이다. 시골 분이다. 묘를 이장할 때 동생을 숫자로 부르는 직원을 보며, "제 동생은 379가 아니라 백 철자 태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장녀 혜영을 보여준 건 괜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혜영도 큰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조금은 녹아들지 않았을까. 

 

 

큰 아버지는 땅에 묻어야 죽은 사람도 산 것이 되고, 태워버리면 진짜로 죽는 게 된다고 말하셨다. 먼저 간 동생을 화장하여 수목장 하는 것이 끝끝내 마음에 걸렸던 건, 동생을 사랑했던 마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거다.

 

 

 

 

"혜영아. 네가 와서 해라."


벌이었는지 무엇인지 술을 올리는 도중에 소동이 일어나 승락이 찰과상을 입어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큰아버지는 혜영이를 부르며 "혜영아. 네가 와서 해라."라고 말씀하셨고 첫째 혜영은 아버지에게 술을 올렸다.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빠에게 적대적인 말을 많이 해왔던 넷째 혜연도 묘 이장 후 밥을 먹으며 구석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셋째인 금희가 왜 옛날 폴더폰을 들고 다니나 했는데 영화 말미로 짐작하건대 아마 생전에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핸드폰이었던 것 같았다. 미처 보내지 못한 미전송 메시지에 딸 넷을 쪼르르 수신자에 넣으시고

 

"우리 집 마당에 꽃이 피었구나. 항상 자랑스럽다. 잘해주어서 고맙다."란 메시지와 함께 빨갛고 예쁜 꽃 사진이 함께 첨부돼 있었다.

 

 

영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어쩌면 폭력적이었고, 아들을 편애하셨고, 어머니에게도 잘하지 못했던 아버지였겠지만, 네 딸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최악의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아버지와 행복했던 시간, 그리움, 아버지를 사랑하는 감정 역시 공존하는 것이었을 테니까.

 

 

이 네 자매. 정말 피 터지게 싸우다가도, 언니 남편이 외도하는 것을 알자 언니보다 더 분노했고, 혹시나 사진이 사라지는 불상사에 대비해 자매가 전부 외도 사진을 백업해서 나눠 가졌다. 막내 승락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우리가 쟤 엄마야?"라고 하면서도 "너도 힘들겠지만 너 여자 친구는 너보다 더 무섭고 힘들 거야. 혼자 고민하지 말고 힘들면 누나들에게 얘기해."라고 다독인 것 역시 누나들이었다. 미우면서도 소중한 동생.

 

 

영화 "이장"은 내가 말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을 다루고 있다. 허나 내 리뷰에서 모든 이슈를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 보는 동안 무언지 모를 것들이 자꾸 스멀스멀 올라와 가끔씩 울컥했지만, 이장을 마치고 다 같이 옹기종기 차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모습을 보며 괜스레 안락한 느낌이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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