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21. 12:40ㆍFilm
커피가 식기 전에 (Cafe funiculi funicula, コーヒーが冷めないうちに) 2018
감독 : 츠카하라 아유코
각본 : 오쿠데라 사토코
원작 : 가와구치 도시카즈의 동명소설
출연 : 아리무라 카스미, 이토 켄타로, 하루
얼마 전 잔잔한 일본 영화를 소개하는 포스팅을 올렸어요. 사실 그 포스팅은 블로그를 시작한 초창기에 작성해놓고 퀄리티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비밀글로 두다가 한 달이 훨씬 넘어서야 공개한 글인데 오히려 재밌게 봐주신 것 같아서 신기하면서도 감사했어요. 저도 제 포스팅을 보니 제가 소개한 영화들과 비슷한 것이 보고 싶어서 일본 영화 특유의 왜색이 짙은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가끔 마녀를 소재로 한 일본 영화를 보았던 것 같아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녀 배달부 키키"도 그랬고, 영화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도 마녀를 소재로 하고 있거든요. 커피가 식기 전에도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특정한 자리에 앉으면 과거든 미래든 원하는 시간으로 갈 수 있다'는 도시괴담이 있는 카페 '푸니쿨리 푸니쿨라'가 배경이에요. 직원인 토키타 카즈와 카페를 방문하며 시간여행을 하는 손님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여행을 하면서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 세 가지가 있는데요.
첫째,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미래는 절대 바꿀 수 없다.
둘째, 시간 여행 중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카페에 방문한 적이 있어야 한다.
셋째, 내린 커피를 식기 전에 전부 마셔야 한다.
커피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커피를 다 마시지 않고 시간 여행 장소에 있는다면 그 시간에 영원히 갇히게 되고 원래의 현실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거예요. 가장 치명적인 룰이죠.
※ 스포일러 없습니다.
카페 쿠니쿨리 푸니쿨라에서 근무하는 주인공 "카즈"예요. 얼굴이 낯이 익어서 계속 생각해보았는데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에서 만났던 배우였어요. 그때는 금발에 말썽꾸러기 학생이었는데 이번 영화에선 차분한 아가씨 역할을 맡았네요.
영화에 나오는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그중에서도 카즈가 중심을 잡고 있어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커피를 내릴 수 있는 건 대대로 카페를 이어가고 있는 토키타 가문의 여자뿐이거든요. 토키타 가문의 유일한 여성인 카즈만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커피를 내릴 수 있답니다.
카페 안 아무 곳에서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위치에서만 가능해요. 그 위치는 바로 저 단발머리에 책을 읽고 있는 여성분의 위치예요. 사실 저분은 시간 여행을 하다가 과거에서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해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에요. 혼은 과거에 갇혔지만 육신은 현재에 있기 때문에, 현실에 있는 몸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손님들은 이 여성분이 화장실 가는 틈을 타서 좌석에 잠깐 앉을 수 있고 그때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요. 저분을 강제로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려고 몸에 손을 대면, 일시적으로 숨을 쉴 수 없는 저주에 걸리더라고요.
시간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이 있어요. 비교적 가벼운 사연부터 묵직한 가슴 아픈 사연까지 다양해요.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헷갈리게 하던 남자가 미국으로 떠나버려서, 치매가 심해져 나중엔 남편인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부인이 자신에게 전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오랫동안 외면해오던 동생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어버려서.
영화를 보며 아슬아슬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어요. 시간여행을 해서 원하던 시간에 도착했을 땐 이미 커피가 미지근했거든요. 우리 다 알잖아요. 커피가 얼마나 금방 식어버리는지. 그 기간을 놓치면 여행한 시간에 갇혀야 하고 두 번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없는 게 이 영화의 세계관이라서요.
과거든. 미래든. 시간여행을 한 사람들은 절대 이미 벌어진 과거를 바꾸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커피가 식기 전의 짧은 시간 동안 머물러 있었지만 현재로 돌아와 미래의 많은 것을 바꾸어냈어요.
영화는 잔인하게도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바꾸어주지 않더라고요. 결국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시간여행을 했던 인물들 전부 과거에 벌어진 일과 현재의 처한 상황은 바꾸지 못했지만 지금의 마음가짐을 바꾸어서 미래의 많은 것을 바꾸어 냈거든요.
영화에서 어린 아가일 때 모기향을 피우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회색빛 재는 과거고 빨갛게 타들어가는 건 현재고 아직 타지 않은 초록색 모기향은 미래야"라고. 어린 아가가 하기엔 꽤나 현학적인 말인데 너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현재도 미래도 너무 금방 과거가 돼버리잖아요. 결국 과거, 현재, 미래는 불가분한 것이고 같은 것이니까요.
"커피가 식기 전에"를 보면서 영화 인셉션도 생각났고 노트북도 생각났고 시월애도 생각났어요. 영화를 보며 이것저것 다른 영화가 많이 생각났지만 그래도 좋았던 영화라고 생각해요. 영화를 보시면 제 말이 공감이 가실 거예요.
아무래도 이런 영화다 보니 저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커피가 식기 전 5분 남짓의 짧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난 어느 시점으로 갈까."하고 말이에요. 누구나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한 번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잘못된 것을, 오해를, 실수를, 상처를, 바로잡기 위해서요.
보통의 영화 리뷰를 할 땐 스포일러를 포함한 리뷰를 쓰는 편인데 이번엔 일부러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은 추천글을 썼어요.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싶은 분들은 영화를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원작 소설을 읽어볼까 해요. 다 읽으면 원작 소설 리뷰도 올려볼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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