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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주실록(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조선공주실록(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조선공주실록(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2020. 6. 17. 18:00Book

조선공주실록 (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신명호 지음

 

 

 

※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역사를 좋아한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역사는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재미있는 요소여서 그렇다. 보통 역사이야기라 하면 정사와 야사로 구분 지을 수 있을 텐데 조선공주실록은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처럼 공적인 기록물이나 한중록 등 개인의 자서전을 기반해서 쓰인 책이므로 정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신명호 작가의 개인적인 사견이 꽤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것과 왕이나 세자의 이야기가 아닌 "공주"에만 초점을 맞춘 책이어서 나에겐 여느 역사 서적보단 새롭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야사를 읽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청나라 옹정제에 관한 도서를 읽은 적이 있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고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공주를 오랑캐(그들 입장에선 본인들 빼곤 다 오랑캐다)에게 시집보냈던 것이다. 전쟁을 막고 화친을 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을 하는 것보다 오랑캐와 혈연을 맺어 화친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로워서다. 옹정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을 오랑캐에게 시집보내는 걸 무척이나 가슴 아파하였지만 결국 딸을 시집보냈다. 그때 어렴풋이 황제의 딸이라고 해도 결혼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국익을 실현하기 위한 존재일 뿐이구나. 순탄치 않은 삶을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조선 공주 실록 서두에 공주의 어원에 대해 설명해 놓았다.

 

'공주'는 중국 황제의 딸들을 혼인시킬 때 '삼관'했기에 생겨난 말이다. 곧 공주란 말의 원초적 의미는 '삼공이 주관해서 혼인시키는 여자'였던 것이다. 황제의 딸들을 혼인시킬 때 '삼공이 주관한'이유는 공주가 그만큼 존귀했기 때문이다. 존귀한 공주는 혼인도 국가적 목표에 부합되어야 했다.

 

 

조선은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기록물도 많다. 학생 때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왜 부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성계의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나 신덕왕후 강 씨에 대한 이름은 전연 없어서 그랬다. 아마 이름을 알면서도 여성의 이름을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 구태여 기록하지 않은 모양이다라고 생각하였는데 아무리 승정원일기며 조선왕조실록이며 유구한 기록물이 잔뜩 있어도 분명 공주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신명호 작가는 공주들의 이야기인 만큼 자료의 한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 조선 공주 실록에선 조선엔 35명의 공주와 77명의 옹주 중 7명의 공주와 옹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정선 공주(태종의 딸)

경혜 공주(문종의 딸)

정명 공주(선조의 딸)

효명 공주(인조의 딸)

의순 공주(효종의 딸)

화완 옹주(영조의 딸)

덕혜 옹주(고종의 딸)

 

 

공주들의 삶은 복잡다단했다. 아마 평탄한 삶을 살았던 공주들이 아니라, 고된 시간을 보냈던 공주들의 이야기여서 그랬을 거다. 7명의 공주와 옹주들이 다 그랬지만 내가 가장 아팠고 마음이 저릿했던 공주는 의순공주였다. 해서 의순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의순공주는 효종의 딸이 아니다. 금림군 이개윤의 딸로 효정이 자신의 양녀로 삼아 공주에 봉작한 것이다. 병자호란에 청나라 태종은 인조에게서 항복을 받기 전 몇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최악으로 패전하였기에 청나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혼인을 통하여 양국의 우호를 증진시키자며 조선의 처녀를 청나라에 바치라는 거였다.

 

 

아무래도 청나라는 만주족이기도 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국가여서 그랬는지 꼭 친딸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수양딸도 좋고 종을 수양딸로 삼아서 보내도 괜찮다고 했단다. 청나라 입장에선 조선의 편의를 꽤 봐준 것 같은데 오랑캐에게 진 것도 억울하고 분할 진대 귀한 딸을 청나라에 공녀로 바치고 싶은 고관대작은 없었던 모양이다. 딸이 없다 거짓말을 했고 다 큰 딸이 2살이라며 거짓말을 했다. 효종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처녀를 최대한 보내지 않으려 했고, 보낼 수밖에 없다면 가능한 최소의 인원을 보내려고 했다.

 

 

모든 대신들이 딸이 없다 발뺌할 때 금림군은 장성한 딸이 있음을 고백하였고 효정은 금림군의 딸을 양녀로 삼았다. 봉작명이 "의순"이다. 의순의 의미는 '대의에 순종했음'을 높이 기리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의순공주란 봉작명에는 금림군과 의순공주에 대한 효종의 미안함과 고마움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의순공주가 한양을 떠나 청나라로 출발하는 날, 효종은 공주를 송별하기 위해 서대문 밖에 모화관까지 가서 백관들을 반으로 나누어 의순공주를 홍제원까지 수행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효종실록에 의하면 청나라로 글려가는 의순공주의 행차를 보며 도성민들 모두 참혹한 마음이었다고 하더라.

 

 

병자호란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해서 왕도 대신들도 백성들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국가를 위해 청나라에 자진하여 시집가는 의순공주를 배웅하며 참혹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여성의 몸으로서 조선의 존패에 대한 큰 부담을 어깨에 지고 청나라로 가던 의순공주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제 내가 분노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효종을 비롯해 종친이나 대신들 중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누구도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금림군 이개윤이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세상에 제 자식이 귀하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세상 어떤 아비가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오랑캐에게 보내고 싶겠는가 헌데 기록에서는 금림군 이개윤이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딸을 팔아먹었다"는 식으로 쓰여 있다고 하니 내가 다 개탄스러웠다. 고의적인 악평이다. 이런 걸 보면 지식인이고 배웠다는 사람들의 의식이 이럴진대 조선이 어찌 500년이나 버텼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의순공주는 자신의 입장과 사명을 이해하고 조선을 위해 섭정왕의 배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그것은 분명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 아버지가 국가에 대해 갖고 있는 충심을 이해하고 짐작하였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의순공주는 섭정왕 도르곤이 첫눈에 반할 정도로 오히려 총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의순공주는 인물도 좋았고 머리도 좋았으며 조국에 대한 충성심도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둘이 잘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도르곤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함께 산 시간은 겨우 7개월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금림군은 청나라 황제에게 글을 올려 의순공주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고는 허락을 받았다. 청나라 세조는 '의순공주가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생각하고는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16세의 나이로 고국을 떠난 의순공주는 7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이다음부터다. 사람들은 금림군 이개윤을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딸을 팔아먹었다"라고 비난했고 사람들은 의순공주를 두고 청나라 오랑캐에게 몸과 마음을 더럽힌 "환향녀" 즉 화냥년이라고들 수군거렸다더라. 내가 가끔 한국 고전 영화를 보는 것을 내 리뷰를 오래 봐오신 분들은 아실 거다. 영화에선 감히 화냥년이란 말을 참으로 잘들 사용한다. 그리고 조선이 망한 지가 언젠데 아직 조선에 살고 있는 인물들이 많다. 난 그 단어가 그리도 비참하고 참담한 역사에서 탄생한 말인데 오늘날에도 욕지거리로 사용한다는 것이 기가 찬다.

 

 

의순공주는 나이 28세에 조선에서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고국에서의 현실이.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여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리 조선이라고 하지만 너무하단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 보면 왜란 때 부산에 있던 임신한 여자들 중에서 왜구의 씨가 아닌 아이가 없다 했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일까. 

 

 

선조 수정 실록에 보면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있다. 기억력 나쁜 내가 오래전에 읽은 실록의 내용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기가 막혀서다.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였다. 이유는 부인이 정조를 잃어서 그렇다. 물론 부인이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왜구에게 정조를 잃었으므로 부부로서의 신뢰가 깨졌다고 보아 더 이상 혼인 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으니 부디 이혼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였다. 선조는 이혼을 허락하였다. 난 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한심하고 무능력한 왕을 꼽으라면 조금의 고민도 없이 선조와 인조를 꼽는다. 

 

 

7명의 공주와 옹주들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이 갔던 건 의순 공주였다. 16살밖에 안된 아가가 속이 얼마나 깊으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싶다. 어쩌면 의순공주는 청나라로 시집갈 때 조선인들이 지금은 자신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추후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미리 계산했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내 눈엔 영리한 아가씨로 보였다. 섭정왕 도르곤과 잘 살면 잘 사는 대로, 못 살면 못 사는 대로 분명 조선인들은 의순 공주를 오랑캐에게 팔려간 여자, 오랑캐에게 정조를 잃은 여자, 환향녀라며 손가락질하고 욕했을 거다. 의순 공주는 아버지인 금림군에게 울며 불며 빌거나 청나라로 떠나는 날 바보인 척을 하거나 모자란 척을 하며 큰소리로 울어버릴 수도 있었을 거다. 아무리 조선시대라고 해도 16살이라면 그런 행동이 충분히 납득될만한 나이니까.

 

 

역사에 대해선. 특히 조선 역사에 대해선 꽤 알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였는데 의순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공주 실록을 통해 처음 접했다.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선의 공주는 의순공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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