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25. 19:03ㆍBook
잊기 좋은 이름
(세상에 잊어야 한다거나 잊어도 되는, '잊기 좋은'이름은 없다.)
김애란 산문
※ 지극히 개인적인 서평입니다.
제가 여태껏 써온 서평에서 김애란 작가를 좋아한다고 몇 번이고 말해와서 제 글을 꾸준히 읽어오신 분들은 잘 아실 것 같아요. 잊기 좋은 이름은 작년 김애란 작가가 써낸 산문집이에요. 이전에 소개해드렸던 '소설가로 산다는 것'에서 김애란 작가의 '여름의 풍속'에 대한 서평을 썼는데요. 여름의 풍속 역시 잊기 좋은 이름에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김애란 작가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그가 그리는 소설 속 세계는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가 주로 다루는 이야기들이 소외되어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쩔 땐 마음이 너무나도 저릿해서 글을 읽는 것이 고문에 가깝다 느낄 때도 있었거든요. 잊기 좋은 이름은 김애란 작가의 에세이예요. 지난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르포르타주 자서전인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서평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출간한 에세이는 꼭 읽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작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어서, 그의 작품 또한 깊게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말이에요. '잊기 좋은 이름'은 그가 출판한 소설과는 온도와 채도가 달랐어요. 따스하고 밝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들이 뭔가 몽글몽글하며 아련한 느낌이랄까요.
잊기 좋은 산문의 말미에 수록된 '작가의 말'을 조금 옮겨볼까 합니다.
이전 원고를 오랜만에 다시 읽고, 고치고, 버리다 '이름'이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저를 스쳐간 사람의 이름, 풍경의 이름, 사건의 이름이요.
저는 여전히 어떤 이름들을 잘 모르고 삶을 자주 오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언가 호명하려다 끝내 잘못 부른 이름도 적지 않고요.
이 책에는 그런 저의 한 시절과 무능 그리고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다 드물게 만난 눈부신 순간도요.
그 이름과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여기 적습니다. (302-303p)
그의 말대로 김애란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연애할 때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었어요. 맨 처음에 수록된 산문인 '나를 키운 팔 할은'이 가장 맘에 드는 산문이었는데요. 전 그의 어머니가 사람이 밥만 먹고살 수 없단 걸 아셨기에 퍽 다행이라고 생각하였어요. 그래서 자녀들에게 책도 많이 사다 주셨고, 피아노도 가르치셨고, 스스로 분칠을 하고 단장도 하셨고요. 만약 김애란 작가가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하지 않아서 작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저 혼자 아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좋아하는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는 이렇게 재밌을 수밖에 없는 건가 봐요.
이번엔 연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작가들은 아무래도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은데, 김애란 작가도 그런 모양이에요. 아래에 책 원문을 소개하겠습니다.
내게 연필이 가장 필요한 순간은 책 읽을 때다. 평소 문서에 줄을 많이 긋는다. 전에는 색연필이나 형광펜을 이용했는데 지금은 거의 연필만 쓴다. 어떤 문장 아래 선을 그으면 그 문장과 스킨십하는 기분이 든다. 종이 질과 연필 종류에 따라 몸에 전해지는 촉감은 다 다르고 소리 또한 그렇다. 그렇게 줄 긋는 행위 자체가 때론 카누의 노처럼 독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과 리듬을 만든다.
이전에 하현 작가의 에세이에서도 그 역시 책을 읽을 때 맘에 드는 문장을 보면 밑줄을 긋고 싶어 안달이 난단 말을 하였는데 작가들은 다 그런 걸까요? 저 역시 아날로그 성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책을 소비할 때는 오디오북도 듣고, 아이패드로 이북도 보지만, 그래도 단연 종이책만큼 좋은 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필기구 역시 샤프예요. 연필도 좋지만 연필은 계속 깎아줘야 하니 귀찮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그어놓곤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요. 저는 한번 본 걸 거의 두 번 다시 보지 않습니다. 작정하고 두 번 보는 게 아닌 이상에야 한번 본 책을 다시 펼쳐볼 일이 없죠. 그래서 이젠 방법을 바꾸었어요. 밑줄을 긋는 대신 필사 노트를 만든 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노트에 필사를 합니다. 그 노트만큼은 가끔 주기적으로 들여다보고 읽어요. 그러면 제가 기록한 문장들을 다시 또 만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제가 너무 좋아서 자주 만나고 싶어 기록한 문장들이니까요.
문장과 스킨십한다는 표현은 어떻게 나오는 표현일까요? 책의 성격에 맞춰 연필을 고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 걸까요? 그렇게도 섬세할 수 있는 걸까요? 전 취미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하자 남자 친구가 교보문고에 데려가서 잔뜩 사주었던 연필로 필사를 할 때 사용하는데 말이에요. 저도 괜히 연필을 종류별로 주르륵 사다 놓고 책에 알맞은 연필을 골라 필사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책을 읽을 때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해질 때가 있어요.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도 잘 읽혀서'예요. 막힘이 없어서요. 잘 읽히는 글을 쓰는 게 정말 어려운 건데 말이에요. '부사와 인사'라는 산문에서 그가 얼마나 부사를 좋아하는지 서술해놓았어요. 부사를 없애라고 하는 건 스티븐 킹을 비롯한 수많은 문호들이 경계하는 부분이거든요. 글의 속도감을 늦추고 지루하게 만들고 모호하게 만든다고요. 저 역시도 (글이라고 할 순 없지만) 포스팅을 할 때 부사를 더 쓰고 싶은 걸 꾹꾹 참으면서 글을 쓰고 있어요.
사랑해와 정말 사랑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랑해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부사가 없다고 해서 원 의미가 퇴색되거나 흐려지는 게 아닐 텐데 왜 전 부사에 최상급까지 더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라는 말이 더 좋은 걸까요.
김애란 작가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잊기 좋은 이름' 산문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평소 그의 작품처럼 무거운 이야기가 아닌 온전히 김애란 작가의 이야기니까요. 저는 마음이 괴로워 끝까지 읽지 못하고 덮어 두었던 그의 소설 '바깥은 여름'을 마저 읽어볼까 합니다.
김애란 작가 에세이가 수록된 '소설가로 산다는 것' 서평
2020/04/25 - [Book] - 소설가로 산다는 것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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