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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그리고 이춘재 l 이제야 보이는 것들 살인의 추억 그리고 이춘재 l 이제야 보이는 것들

살인의 추억 그리고 이춘재 l 이제야 보이는 것들

2020. 8. 9. 20:00Film

살인의 추억 그리고 이춘재 l 이제야 보이는 것들

살인의 추억 (Memories of Murder) 2003
감독 : 봉준호
각본 : 봉준호, 심성보
음악 : 이와시로 타로
원작 : 김광림 희곡 '날 보러 와요'
출연 : 송강호, 김상경, 김뢰하, 변희봉, 송재호, 박노식, 류태호, 박해일, 전미선

 

살인의 추억 줄거리

1986년 경기도 화성군. 젊은 여인이 무참히 강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2개월 후, 비슷한 수법의 강간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화성 일대는 연쇄살인이라는 생소한 범죄의 공포에 휩싸인다.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임이 밝혀지고 그의 사진을 공개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알려져 왔던 몽타주와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닮았었기 때문이에요. 

 

 

새삼스레 살인의 추억이 보고 싶었던 이유는 얼마 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되었던 현정 양의 사건과 8차 사건의 모방 범죄 범인으로 지목돼 20여 년의 수감생활을 하였던 윤 모 씨 사건 때문입니다. 저는 이춘재가 화성 연쇄 살인의 범인임이 밝혀진 것도 충격이었지만, 억울한 옥살이를 하였던 윤 모 씨의 결백이 밝혀진 것이 더 충격이었어요. 그 세월과 고통을 무슨 수로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이춘재가 여죄를 고백하는 과정에서 8차 사건 또한 자신이 저지른 일임을 밝혔고, 그와 함께 드러난 또 하나의 사건이 현정 양 사건이에요. 유가족들은 현정 양이 여태껏 실종된 줄 알았고 다른 집에서 잘 사는 줄 알았다가 이제야 실종된 그날 사망했음을 뒤늦게서야 알게 된 거죠. 당시 수사관들은 현정 양의 유골을 발견하였음에도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았고 수사를 조작하고 은폐하였습니다.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였던 윤 씨, 그리고 의도적으로 은폐되었던 현정 양. 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춘재의 자백을 통하여 그동안 범인으로 몰려 고통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조작되고 은폐되었던 피해자들.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좋았어요.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80년대에 발생하였던 사건임에도 제가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알고 있는 이유는 영화 살인의 추억 때문이에요. 백광호의 이름은 기억 못 해도 향숙이를 기억하는 분들은 많을 것 같아요. 전 이 영화를 10대 때 보았는데 그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땐 왜 보이지 않았을까요.

 

 

영화를 잘 모르는 제가 보아도 살인의 추억이 수작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아요. 이번 포스팅은 영화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영화를 보며 제가 사유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진범이 잡고 싶은 걸까. 아니면 승진이 하고 싶은 걸까.


백광호의 운동화로 증거 조작

 

유도신문과 억지 자백 강요

백광호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화가 난다고 불구덩이에 집어넣어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고, 뇌 손상을 입었습니다. 누가 봐도 지능적인 범죄를 일으킬만한 인물이 아니죠.

 

 

무당 눈깔이고 촉이 좋다고 자처하는 박두만은 광호의 운동화로 증거를 조작하고, 광호를 구슬려 유도신문을 합니다. 백광호의 진술을 듣고 그가 사건의 목격자인 것조차 초반에 파악하지 못했어요. 아무나 집어넣어 승진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정말로 범인을 잡고 싶었던 걸까요.

 

 

그나마 서울에서 온 이성적인 서태윤 형사 덕분에 백광호는 풀려납니다.

 

 

 

 

경찰과 깡패 사이


예전에 보았을 땐 왜 몰랐을까요. 수사를 하다가도 맘에 안 들면 폭력을 행사합니다. 심심풀이로 때리는 것 같기도 해요. 조용구는 얌전히 앉아 조사를 받던 백광호를 발로 차 버려요.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뭐지? 왜 때리는 거지?"싶더라고요. 

 

 

조용구는 고졸인 형사인데 2년제 대학을 졸업한 박두만에게 MT와 OT에 대해 묻는 걸 보면 대학 생활에 대한 동경과 자격지심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 같았어요. 운동권 학생들을 과하게 진압하거나 선술집에서 대학생들이 경찰 욕을 한다고 두들겨 패는 것 역시 거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박두만이 서태윤을 처음 보았을 때 상황을 오해하여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하고 날아 차기를 하는 게 이전에 보았을 땐 웃음이 나왔는데, 이제 와서 보니 많이 언짢더라고요. 아무리 80년대라고 해도 저렇게 할 수 있나 싶어서요. 

 

 

 

 

이성적이었던 서태윤이 감정적이 되어가는 이유


수사를 돕기 위해 서울에서 온 서태윤 형사는 시골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수사하는 박두만과 조용구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냉철해요. 백광호와 조병순이 범인이 아님을 알아챈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러던 그도 범인의 잔인하고도 끔찍한 범행 때문에 조금씩 감정적이 되어 갑니다. 생존자로부터 범인이 손이 곱고 부드러웠다는 증언을 들은 서태윤은 백광호와 조병순을 풀어주는 동시에, 비 오는 날마다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신청했던 손이 부드러운 박현규에게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요.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여학생. 그리고 밴드를 붙여주었던 여학생이 범인에게 희생당한 것을 보고 서태윤은 점점 박현규에게 집착하고 막무가내가 되어 갑니다. 범인과 박현규의 유전자 감식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나왔는데도 말이에요.

 

 

 

조금씩 박두만에게 동화되는 서태윤 형사

박두만과 서태윤이 조금씩 닮아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이 이런 장치를 통해서가 아니었나 싶어요. 비슷하게 엎드려 있는 자세라든가, 범인을 쫓느라 나란히 달려가는 모습이라든가 하는 것에서요.

 

 

오히려 증거 조작에 점집까지 찾아가며 무당 눈깔을 자처하던 박두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적이게 되고, 서류는 거짓말 안 한다고 시골 형사들의 수사를 한심하게 여기던 서태윤은 조용구처럼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변해요.

 

 

 

 

이제야 보이는 것들


용의자로 몰려 고문을 받고 자백을 강요당했던 백광호, 조병순, 박현규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렸던 윤 씨, 그리고 오래전 시신이 발견되었지만 경찰 조직에 은폐당해 이젠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현정 양, 그리고 그 당시 범인으로 몰려 고문 후유증으로 유명을 달리한 수많은 분들.

 

 

살인의 추억에서 용의자로 몰려 고문과 자백을 강요받고 심지어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됐던 백광호, 조병순, 박현규 전부 그 당시 실제 피해자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캐릭터겠죠.

 

 

 

용의자로 몰렸던 백광호가 끝내 기차에 치여 사망하는 설정 역시 수사 과정에서 희생당한 선한 피해자들이 있었음을 함축하는 거였다고 생각해요. 결국 박두만의 손에 피를 묻힌 것도요. 직접적이진 않지만 백광호를 죽인 것이 박두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였겠죠.

 

 

 

영화 살인의 추억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미친 듯이 노력했지만 끝내 진범을 잡지 못한 형사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유는 "미치도록 잡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카피 라이터와 함께 세상 순박해 보이고 선해 보이는 저 형사 둘이 선하게 웃는 모습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들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도 미화됐던 걸까요.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

 

 

저는 살인의 추억하면 이와시로 타로가 작업하였던 모든 OST가 기억에 남지만 그중에서도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 트랙이 가장 기억에 남거든요. TV를 안 보는 제가 유일하게 보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가끔 BGM으로 사용되기도 하고요.

 

 

그 당시 형사들이 정말로 허수아비에 너는 자백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고 써놓았다고 해요.

 

 

등화관제 날 범인에게 살해당한 여학생의 시신을 보고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던 서태윤 형사가 어떻게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피해자에게 복숭아 조각을 넣어놓은 걸 보고 범인의 잔인함에 아연실색하며 그동안 정리해왔던 용의자 목록을 한 장 한 장 찢으며 휴지통에 집어넣었던 박두만이 어떻게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이런 주먹구구식 수사와 자백이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됐던 수사 관행 덕에 엉뚱한 용의자를 잡아서 고문을 일삼고 거짓 자백을 만들어냈던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 당시 수사 과정에서 용의자로 몰린 3명의 남성이 자살하였고 1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비공식적인 피해자는 더 많을 거라고 봐요. 

 

 

14명을 살해하고 9명을 성폭행했던 이춘재 사건은 지난 7월 2일 34년 만에 종결되었습니다. 수사 종결 소식을 들은 고 현정 양의 아버지는 이제 우리는 시작인데 뭐가 끝난 거냐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경찰 조직에서도 제 식구 감싸기가 아니라 이제라도 그 당시 사건을 은폐하고 진짜 범인을 찾기보다 엉뚱한 사람을 잡아 범인으로 몰았던 사람들은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고,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에 대한 합당한 보상도 이루어져야 하고요. 신뢰를 회복하기에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최소한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국민들로 하여금 사법 제도에 대한 믿음을 주는 유일한 길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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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은 수미쌍관의 구조를 이루고 있어요. 처음에 1986년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농수로에서 사망한 피해자를 들여다보던 박두만과, 2003년 박두만이 우연히 범죄 현장을 지나가게 되며 다시 한번 농수로를 들여다보는 구조죠.

 

 

농수로를 들여다보던 박두만에게 한 꼬마 아가씨가 "얼마 전에도 어떤 아저씨가 이 구멍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라고 하죠. 그래서 그 아이가 그 아저씨에게 왜 그 안을 들여보느냐고 물었더니 "옛날에 여기서 내가 했던 일이 생각나서 진짜 오랜만에 와봤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박두만은 그 남자의 인상착의를 묻지만 아이는 "그냥 평범해요."라는 말만 전해요. 그 이후로 충격을 받아 혼란스러운 듯한 박두만이 화면을 바라보며 영화가 끝나죠. 

 

 

여담으로 범인이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것과 달리 이춘재는 자신의 사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경찰들의 수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자신의 범행이 나온 신문 기사나 뉴스를 보지도 않았으며 다시 범행 장소에 찾아가지도 않았다고 해요.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을 만들면서 범인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단 말을 하였다고 해요. 저는 대학생 때 범죄 심리학을 수강하며 화성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지라 범인의 몽타주도 익숙하고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그를 어떻게 묘사하였던 것들이나 범행 방법, 범행 시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영화 속 스타킹을 사용하여 피해자를 교살하던 범인의 모습을 보니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유쾌한 내용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영화를 한 번쯤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사유하였던 것으로 적어나간 글이라 영화의 장치에 대해 하나하나 언급하진 않았지만, 영화 속 디테일한 장치가 굉장히 많아요. 영화나 시나리오를 공부하시는 분들에게도 큰 공부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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