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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사전 서평 l 나 작가가 되고 싶어! 트라우마 사전 서평 l 나 작가가 되고 싶어!

트라우마 사전 서평 l 나 작가가 되고 싶어!

2020. 8. 16. 20:00Book

트라우마 사전 서평 l 나 작가가 되고 싶어!

작가를 위한 캐릭터 창조 가이드

트라우마 사전 (The emotinoal wound thesaurus)

안젤라 애커만, 베카 푸글리시 지음

"이야기의 힘은 캐릭터에서 나온다"

 

 

 

※ 개인적인 서평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종이책을 샀다. 손 끝에 닿는 까슬한 종이의 감촉이 좋다. 요즘엔 종이책보다 이북으로 책을 더 많이 소비하지만, 이 책만큼은 실물로 소장하고 싶었다. 두고두고 곁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펼쳐보고 싶어서.

 

 

트라우마 사전. 영제는 The emotional wound thesaurus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감정적 상처 모음집. 스토리텔링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 지를 목차별로 소개해놓았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 서평에서 "나도 언젠가 겁도 없이 습작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라는 말을 하였던 것 같은데 내가 만약에 소설을 쓰게 된다면, 많은 사람에게 감응을 불러일으키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를 탄생시킬 때 이 책이 무척 유익할 것 같아서.

 

 

내 글을 읽어오신 구독자님들은 내가 '서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아실 거다. 영화 리뷰를 하면서 구멍 뚫린 전개와 개연성 없는 진행에 분개하고, 공중에 붕 떠서 납득 안 되는 캐릭터로 엉터리 시나리오를 만들어 관객을 기만하는 영화는 숨김없이 혹평을 해왔던 것 역시 아실 거다. 시나리오를 써 본 적은 없지만 서사를 탐하는 사람으로서, 억지 감동을 연출하거나 작위적인 전개로 러닝타임을 꽉 채운 영화엔 화가 난다. 제대로 시나리오를 공부한 사람들인지 의구심이 들어서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영화는 지루한 것이 잘려나간 인생이다."라고 말했고, 약 20여 년 전 효리언니는 텐미닛에서 "영화 속 10분. 1년도 지나쳐."라고 말했다.

 

 

소설 속. 영화 속. 드라마 속에서 10분은 10년도 100년도 뛰어넘을 수 있는 순간이다. 지루한 것이 잘려나가고 핵심만 모아놓은 응축물이다. 현실의 캐릭터처럼 사실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독자들이, 관객들이, 가상의 현실이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믿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전제다. 그러려면 플롯에 앞서 사실적이고 탄탄한 캐릭터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트라우마 사전은 캐릭터를 만들 때 어떤 과거를 지나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그의 인생에서 어떤 고난이 있어 특수한 트라우마를 만들어냈고 그것으로 예측할 수 있는 캐릭터의 모습을 목차별로 정리하고 있다.

 

 

난 가끔 사람이 사는 게 너무나도 빤하단 생각을 한다. 내가 감내하고 있는 것들이. 내가 겪는 고통이. 내가 줄기차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들이. 사실 하나도 특별할 게 없어서 그렇다. 우리가 겪는 모든 번뇌와 괴로움은 규정된 어느 카테고리에 속한 것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현현하고 불온한 내 고민도 결국 어느 범주안에 들어가는 뻔하디 뻔한 범속할 문제일 뿐이라는 거. 나도. 너도. 우리 전부 다.

출처: https://apryllyoonj.tistory.com/109 [always the same but never stale]

 

몇 달 전 작성하였던 심영섭 작가의 "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의 서평의 일부를 인용해보았다. 가끔 내가 쓴 글을 스스로 인용하기에 부끄럽단 생각이 들지만,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전에 서평을 쓰며 모든 고통과 번뇌가 규정된 어느 카테고리에 속한 것뿐이라고 써놓았는데, 트라우마 사전을 보며 "아. 역시 내 생각이 맞는구나."라고 느꼈다고 해야 하나.

 

 

사람은 의뢰로 예측 가능하다. A라는 사건을 겪으면 B라는 반응을 보이게 되고 C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게 돼서 인생을 살아갈 때마다 D와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것. 그래서 혹시, 트라우마 사전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상세하고도 제너럴 한 트라우마를 목차별로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자신이 갖고 있거나 경험했을 트라우마도 갑자기 마주하실 수 있다. 그때 감정적으로 힘들 수 있느니 책을 읽으실 때 시간적 여유를 두시고 천천히 읽으시길 권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볼 때마다 내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오랜 기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와서 그렇다.)

 

 

예전에 어느 서평에서 흘리듯 말했는데 난 빵을 만들 줄 안다. 빵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 독학으로 베이킹을 배웠고 어느 정도의 제과와 제빵은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다. 서사를 좋아하면서 왜 소설을 써 볼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바보

 

 

마지막으로 트라우마 사전에 수록되어있던 한 문단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려 한다. 꼭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크고 작은 트라우마 한 두개 쯤은 맘 속에 품고 살지 않나. 그런 분들을 위해 이 문단을 소개하고 싶다.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극복하는 일이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지는 않는다. 캐릭터가 자신의 호를 항해하며,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마치는 데는 이야기 전체가 필요한 법이다. 따라서 캐릭터가 느닷없이 상처에 직면하고 순식간에 극복한다면 독자들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에서 상처가 순식간에 해결된다면, 애당초 이야기 구조를 형편없이 설계했기 때문이다.
사건이 적절한 때 일어나면서 리듬을 끝까지 엄격하게 유지하는 이야기를 설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정복해야 할 문제다. 정보가 이야기 전체에 걸쳐 적절한 장소에 자리 잡고 있어야, 캐릭터가 자신의 호를 횡단하며 여정을 완수하는 순간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을 독자들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106p)

 

남자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자기야. 시간은 우리 편이야."라고.

 

 

당신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하물며 허구의 캐릭터에게도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극복하는 일은 하룻밤 사이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해결되는 트라우마는 트라우마라고 할 수 없다. 캐릭터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지난한 과정에서,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꼴이 된 것처럼 성공인 줄 알았지만 허상이었던 얄팍한 페이크 성공도 필요하고, 쓰디쓴 고통도 필요하며, 비슷한 실패를 겪는 것 역시 필요하다. 만들어진 가상의 캐릭터도 그럴진대 우리는 어떻겠는가.

 

 

온갖 고난을 아슬아슬하지만 묵묵히 헤쳐온 캐릭터가 종국엔 트라우마를 극복하듯이 우리들도 그런 것 아닐까. 우리의 인생을 항해하며 마음에 남겨진 상처를 마주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견디고 나면, 추후에 비로소 항해를 마치는 순간 트라우마 따위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순간이 반드시 오지 않을까. 그러니 상흔이 아무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시간은 당신의 편이니 절대로 포기하지 않기를.

 

 

이제 겨우 일독을 했을 뿐이고, 필요할 때마다 사전처럼 곁에 두고 참고하려 한다.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작법서가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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