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20. 18:34ㆍFilm
사라진 시간 결말 해석 리뷰 후기 l 나와 나
사라진 시간 (Me and Me) 2019
감독 : 정진영
주연 : 조진웅, 배수빈, 정해균, 차수연
사라진 시간 줄거리
시골 마을, 남들에게 들킬 수 없는 비밀을 지닌 교사 부부는 마을 사람에게 비밀을 들키게 됐다. 곧이어 불행이 닥쳤고, 수사를 맡은 형구는 마을 사람들의 수상쩍은 모습에 단서를 얻어 사건을 추적한다. 형구는 수사 과정 중 마을 어르신이 건네준 술 한잔을 얻어먹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집도. 가족도. 직업도. 나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형구는 자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2020년에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난해한 영화를 꼽으라면 조금의 주저도 없이 사라진 시간을 꼽을 듯싶다. 영화를 보고 나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무얼까.. 이게 뭘까.. 뭐지.. 뭐지?' 종일 생각해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름 영화 리뷰어인데, 꼭 바보가 된 느낌이다.
작품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고자 사라진 시간을 연출한 정진영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이토록 실험적이고 불친절한 영화를 내보인 그는 "애초에 안전한 규칙대로 가려고 한 작품이 아니라 자유로운 작품이다. 한 번에 와 닿는 영화가 아니라 한 템포, 두 템포 뒤에 생각나는 영화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갑자기 시작해 갑자기 끝나는 형식을 정했고 놀랐다는 반응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이야기는 옳고 그름을 전혀 판단할 수 없는 영화다."라고 답했다.
정진영 감독은 영화 사라진 시간을 통해 타인이 규정한 삶과 자신의 바라보는 삶, 그 간극 속에 놓인 인간의 고독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맨 마지막 그의 말이라면 이 신박한 영화의 가닥을 조금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 영화 사라진 시간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담고 있으며 주관적인 리뷰임을 밝힙니다.
꿈과 현실
어릴 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방송에서 소개가 되었던 사연인데, 그분은 중학생 때 이후로 기억이 없다고 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방의 구조가 바뀌어 있었고 부모님의 얼굴이 갑자기 너무 늙어있어서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했더니 시간이 10년이 넘게 흘렀고 중학생 때 이후로 성인이 될 때까지의 기억을 전부 잃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그 사이의 기간을 고의적으로 지워버린 거라고.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에서도 주인공인 셀레나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성추행당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워낸 것을 볼 수 있다.
박형구의 경우는 앞서 설명한 것과는 다른 층위의 문제다. 기존의 삶에서 몇 년의 세월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가 영위하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사랑하는 부인, 자녀들. 적성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던 직업. 그가 이뤄놓았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전혀 알 수 없는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됐다. 근데 그것이 원래 본인의 것이라고 한다.
처음엔 형구가 긴 꿈을 꾸는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 독한 술을 다시 마시고 나면 전지현이라는 이름을 지닌 부인과 축구를 잘하는 아들 박지성, 박주영과 사랑해 마지않는 직업인 경찰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깨지 않는 꿈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꾸는 그를 보면 자꾸만 의심하게 된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 거지?'
박형구가 등장하기 전, 형구의 집에서 살고 있던 그 부부는 누굴까. 부인이 밤마다 귀신에 빙의되는 비밀을 지닌 그 부부를 왜 오프닝 시퀀스의 30분이나 되는 긴 시간을 소비하며 보여줬던 걸까. 맥거핀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찜찜하다. 그대로 사그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부는 분명 형구와 관련이 있다. 남편의 직업은 형구의 직업이었던 '선생님'이었고, 부인은 형구가 수강했다던 '뜨개질 수업의 수강생'이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 형구가 있는 탕 속에 함께 들어오기도 한다.
부부가 한 공간에 갇혀 서로를 꼭 껴안았던 그날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불이 났고 그들이 사망함과 동시에 형사인 형구가 등장한다. 꿈속에서 조각조각의 파편 속 형구의 자아를 둘로 나눈 것이 그들일까.
타인이 규정한 삶 속의 '나'
사라진 시간이 출연 배우에게도 난해했던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정해균 님은 정진영 감독에게 뭐가 진짜냐고 물었다고 한다. 감독님은 '다 실제라고 생각해'라고 답하셨다고.
정해균은 부부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이며 형구하고도 관련 있는 인물이다. 어쩌면 부부와 형구를 이어주는 매개체 같기도 하다. 부부의 비밀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 해균이기도 하니까. 그에게 형구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형사님'이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그는 형구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이 기괴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형구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으로 이전의 삶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선생님이고 가족이 없는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 이 꿈에서 깨려고 사람을 죽이고 불을 내고 술을 진탕 마시지만 지긋지긋한 꿈은 절대로 깨는 법이 없다. 무엇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형구는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한다. 이 기괴한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을. 어떻게 된 것인지 갈 때마다 수학 시간인 선생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범인만 잡던 형구는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려 공부를 한다. 말도 안 되는 삶에 억지로 짜 맞추어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타인이 규정한 '선생님'으로서의 삶을. 타인이 규정한 '미혼'으로서의 삶을.
Me and Me
타인이 규정한 삶과 자신의 규정한 삶. 난 정진영 감독의 이 한마디에서 힌트를 얻었다.
형구가 이전에 살았던 삶은 전지현이라는 이름의 부인과 축구에 소질이 있는 박지성, 박주영이라는 두 아들을 둔 가장이었으며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지휘하는 형사였다. 아마 그가 원했던 이상적인 삶일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난 형구는 시골 마을에서 초등학생 교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미혼이다.
타인이 규정한 삶이 초등학교 교사에 미혼인 지금이라면, 형구 스스로 규정한 삶은 이전의 삶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형사라고. 남편이라고. 아빠라고 생각하는데, 타인이 보는 그는 초등학교 선생님인 미혼 남성이니까. 그가 원하고 희망하였던 삶과, 현실의 삶의 괴리. 간극.
사라진 시간이라는 우리말의 제목보다 Me and Me라는 영제가 훨씬 더 직관적이다. 형구와 형구는 전부 '나'다. 그 둘은 모두가 형구이다.
둘 다 현실이어도 좋고, 둘 다 꿈이어도 좋고, 그 어느 하나가 꿈이든 현실이든 간에 어차피 감독님도 영화의 결론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미 작품이 나왔고 판단은 관객의 몫이니 이제 여기서 내가 사유했던 것을 말해볼까 한다.
난 형구가 하룻밤 꿈속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달콤하여 여태까지 구축해온 모든 삶을 지워버릴 만큼 형구가 그 꿈을 갈망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마 조그만 동네에서 오며 가며 마주쳤을 경찰서장의 부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둔갑시키면서. 뜨개질 선생님의 번호를 자신의 번호라고 생각하여 적어놓으면서.
꿈은 맥락이 없다. 형구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았을 때 전문의가 꿈이라는 것이 떠다니는 기억의 파편 조각이라고 한 것처럼, 꿈은 개연성과 맥락이 없는 일련의 사건들이 꽤나 그럴듯하게 진행된다. 수상한 비밀을 지닌 부부의 이야기가 형구의 꿈이라고 한다면 그 괴상한 전개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난 사라진 시간 속 두 포지션의 형구가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명징하게 구분할 수 없었고, 두 개의 인생이 모집어 꿈 같이 느껴졌다. 부부가 등장하였던 초반의 30분 역시 갑자기 귀신이 빙의되는 알 수 없는 전개였고, 초등학교 선생님인 형구는 사람을 죽여 불태웠는데 사람이 아닌 고라니였다. 두 상황이 전부 현실 같지 않았고 꿈처럼 모호했다.
왼쪽의 포스터라면 조금 더 이해가 쉽다. 오른쪽의 포스터는 마치 스릴러 추격전 같은 상업 영화의 느낌을 짙게 풍긴다. 영화를 볼 때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 보는지라 사라진 시간을 볼 때도 이런 전개인 것을 모르고 보았는데, 초반 시퀀스를 보며 서울에서 온 젊은 부부가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시골에서 교사일을 하며 살아가는데 못된 마을 사람들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어 강단 있고 유능한 형사가 내려와 무슨 사연으로 이 예쁜 부부가 하루아침에 죽게 된 건지 낱낱이 파헤쳐주는 통쾌한 영화일 줄 알았다.
포스터로 관객을 속인 셈이다. 오른쪽의 조진웅 님의 모습을 보며 이런 미심쩍은 영화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오랫동안 배우로서 연극과 영화판에 몸 담았지만 오랫동안 감독을 꿈꾸었다는 배우 정진영. 내 멋대로 주제넘게 유추해보자면 사실 배우 정진영이 어릴 때부터 동경해왔고 진짜 원했던 삶이 감독이었다면. 형구가 오랫동안 갈구하였던 삶이 형사였던 것이었다고 이해해도 될까.
아직 어리고 그리 긴 인생을 살진 않았지만 어렸을 때 막연히 내 나이가 되면 이 정도는 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뭉근히 기대하던 것이 있었다. '적어도 이만큼은 이뤄놓았을 거야.' 하는 것들. 난 내가 꿈꿔왔던 이상향의 삶과 얼마나 비슷한 삶을 살고 있나.
형구가 교사라는 현실에 순응하여 서서히 그 삶에 녹아들려 할 때 무언의 좌절감을 느꼈다. 형구의 학생인 진구의 말에 따르면 경찰 공무원은 6개월만 공부하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교사를 할 정도의 실력이면 경찰 시험 역시 붙을 수 있을 것이다. 형구가 갈망했던 형사의 꿈을 교사인 형구가 이뤄내면 안 되는 걸까.
맘에 들지 않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려는 형구가 원망스러웠다. 이전의 삶에 천착하던 모습이 점점 사라지는 것도 원망스러웠다.
사라진 시간은 이례적이다. 언뜻 포스터만 보기엔 상업 영화의 클리셰를 적절히 배치하여 쉬운 공식인 영화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 영화는 그 어떤 것도 전형적이지 않다.
영화 말미에 형구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던 뜨개질 선생님이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며 말 못 할 비밀을 형구에게 털어놓을 때 나는 또 미궁에 빠져들고 만다. 왜 초반에 나왔던 교사 부인과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거지? 왜 초희는 빙의 증상을 겪는 거지? 그럼 형구는 초희가 빙의 증상을 겪고 있다는 걸 사전에 알았다는 것이 되나.
남들은 짐작하지 못할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던 형구의 눈물과, 비밀을 털어놓고 상대의 반응을 보고는 감복하여 눈물을 흘리는 초희의 눈물은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여 흘리는 눈물이기에 납득이 되지만 왜 초희는 빙의 증상을 겪는 거냔 말이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영화다.
부족한 이해력으로 내가 유추한 사라진 시간은 이런 것이었다. 형구가 무엇인지 끝없이 고민하다 그 질문은 결국 나는 무엇일까라는 것까지 당도했다. 무척 실험적이며 고무적인 작품이었고 너무나도 불친절해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인 영화였지만 이상하게 감독 정진영의 차기작이 기대가 된다.
그땐 그의 작품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유추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마스 스위치 - 한번 더 바꿔? l 현대판 왕자와거지 (3) | 2020.11.26 |
---|---|
영화 런 결말 스포 후기 리뷰 줄거리 l 도망쳐 (6) | 2020.11.26 |
어린이 크리스마스 영화 추천 l 징글 쟁글: 저니의 크리스마스 (8) | 2020.11.19 |
청사 1993 l 인간이 제일이라는 오만 (7) | 2020.11.17 |
홀리데이트 후기 엠마 로버츠 l 사랑한다 말하는 용기 (9) | 2020.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