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라이즈 그리고 비포 선셋 l Fall in love with stranger

비포 선라이즈 (Berofe Sunrise) 1995 l 비포 선셋 (Before Sunrise) 2004
감독 : 리저드 링클레이터
출연 :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비포 선라이즈 줄거리

파리로 돌아가는 셀린, 그리고 비엔나로 떠나는 제시. 기차 안에서 우연히 조우한 그들은 첫눈에 서로에게 깊이 매료된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음이 없다는 걸 알았던 제시는 셀린에게 다가가 하룻밤 동안 자신과 시간을 보내자는 제안을 한다. 단 하룻밤 동안 그들은 있는 힘껏 서로를 사랑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비포 선셋 줄거리

비엔나에서 하루를 보낸 후 약속했던 6개월 후의 만남은 어긋나버렸고, 첫 만남 이후 9년이 지난 시점. 파리에서 조우한 그들은 9년의 세월만큼이나 다른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제시가 뉴욕으로 떠나기 전까지 제시와 셀린은 그동안의 간극을 매우듯 이야기를 채워간다.

 

여행지에서. 혹은 낯선 곳에서. 낯선 이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나는 몹시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를 꼽으라면 단연 비포 시리즈디. 은근 평가에 박한 나는 별점 5개는 여간해선 주지 않는데, 비포 시리즈는 왓챠에서 유일하게 5점을 줬다.

 

한 번 본 거는 절대로 다시 보지 않는 내가 또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좋을 만큼, 정말 좋아하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은 비포 시리즈 3부작 트릴로지으로 불린다. 비포 미드나잇은 나중에 리뷰하고, 우선 이 둘을 함께 묶어 리뷰를 쓰고 싶었다.

 

가장 맛있는 걸 가장 나중에 먹는 나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잘 쓰고 싶어 오랫동안 리뷰를 미뤄왔다. 이미 아실 줄거리를 만연하게 늘여놓기보단, 내가 감응했던 것에 대해 기록하고 싶다.

 

 

※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Fall in love with str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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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차에서의 만남. 둘의 모습은 20대 초반의 풋풋한 대학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던져서 사랑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둘 다 대학생으로 설정된 만큼 둘이 나누는 대화는 나름 현학적이었고, 자신의 의견을 상대에게 진솔히 전한다.

 

뭐라 해야 할까. 그 둘의 만남을 온 우주가 축복해주고 소중히 여겨준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연히 만난 손금 점을 보는 할머니가 그들의 운을 점쳐 주었던 것. 거리의 행인이 자신이 너희에게 시를 써줄 테니 맘에 든다면 나에게 적선을 해주겠냐는 것. 패기 있게 펍에 들어가 자신들의 사정을 말하고 와인 한 병을 주실 수 없냐고 했더니 사장님이 오늘 너희 둘이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내라며 선뜻 와인 한 병을 내어주던 것.

 

그 둘이 함께 있던 모든 순간이 영화 같았다. 서로의 지나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함에 있어서도 망설이지 않는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해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것은 하룻밤일 수도 있고 반나절일 수도 있고 찰나의 순간일 수도 있다. 그렇게 겁도 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두 캐릭터이기때문에 이 영화가 매력적인 것일 테다.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장면은 보는 나까지 애틋하게 한다. 둘은 연락처를 공유하지 않고 6개월 후 이 장소에서 만나자는 낭만적인 약속을 끝으로 영화는 운치 있게 마무리된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시점. 제시는 하룻밤 프랑스 여인과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소설로 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6개월 후에 만나기로 했던 약속은 셀린의 사정으로 지켜지지 못했다.

 

파리의 한 서점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진 후 제시는 셀린을 만난다.

 

해가 뜨기 전까지 함께 있었던 그들은, 이번엔 해가 지기 전까지 함께 있기로 했다. 전편에서 그렇듯 이번 편도 그 둘은 시종일관 대화를 나눈다. 둘이 함께 걷고 카페에 도착하고 또 셀린의 집에 바래다주는 그 순간까지 그 둘의 대화는 끊임이 없다.

 

처음엔 지루하단 생각이 들었고, 전작보다 못하다고 느껴졌다. 9년 동안 어떤 삶을 보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들이 하는 얘기는 피상적이었고, 굳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의미 없는 대화였으니까. 

 

"그렇지. 이래야지. 당연히 이래야지"

 

라고 느껴지던 순간이 있다. 셀린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셀린이 제시에게 자신의 감정을 퍼붓던 순간이다. 셀린이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말라면서 제시에게 화를 내고 감정을 분출하던 그 순간, 비포 선라이즈에 버금가는 전율을 느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둘이 관람차를 탈 때 셀린이 머뭇거리는 제시를 보고 "Are you gonna trying to kiss me?"라고 물어보고 키스했던 장면만큼, 셀린이 감정을 터트리는 감정이 비포 선셋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다.

 

둘의 진짜 대화는 비로소 그때부터 시작된다.

 

셀린과 제시는 그날 일에 대해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제시는 어떻게 콘돔 브랜드까지 기억하는데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고 하지만 셀린은 스스로가 처음 본 남자와 관계를 가지는 성정이 아니니 절대 아닐 거라며 웃고 말아버린다.

 

차 안에서 셀린은 진실을 털어놓는다.

 

사실 셀린은 그날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결혼해 아이가 둘 씩이나 있는 제시에게 아직 혼자인 자신이(물론 자신이 선택한 삶이지만) 괜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썼으면서도 행복한 가정을 꾸린 그를 보며 묘한 질투심이 일었을 것이다. 그날 함께했던 시간을 세세하게 기억하지만, 꼭 그것이 오래전 한여름밤의 꿈같은 기억을 붙들고 사는 것 같아 보일까 봐 걱정이 됐을 것이다.

 

기억이 잘 나지 않은 척했던 건 셀린의 자존심이다. 나에게 넌 하룻밤 추억이고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 난 그날 너와 함께 있었던 순간이 흐릿한 것은 그날과 네가 나에게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알았다. 셀린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았다.

나여도 그랬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 속에 쓰인 자신의 모습에 분함을 느끼는 것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아는 것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누구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지긋지긋해져 버린 30대 초반의 셀린이, 마치 내일 세상이 멸망이라도 할 것처럼 겁도 없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를 사랑했던 20대 초반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분한 기분이 드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았다.

 

셀린의 집에서 셀린이 작곡했다는 왈츠 포 어 나잇 곡을 제시 앞에서 들려주는 씬이 있다.

듣고 나면 제시가 셀린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책을 썼다는 것처럼, 셀린 역시 제시를 얼마나 그리워했고 사랑했는지를. 그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셀린은 너 이러면 비행기를 놓칠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안다.

제시는 그날 뉴욕행 비행기를 놓쳤을 것이다.

 

둘은 삼십 대 초반이 되었다.

9년 전과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주름도 늘었다.

그렇지만, 어긋났던 것들을 바로잡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제시와 셀린의 진짜 사랑은 이제 시작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혼자 하는 여행도 좋아한다. 외롭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여행지에서는 평소에 안 하는 행동을 한다. 평소에는 안 입을 옷을 입고, 안 할 행동을 한다. 예를 들면, 난 평소에는 남들에게 선뜻 말을 걸거나 다가가는 사람이 아닌데, 여행지에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살갑게 말도 잘 걸고, 같이 여행을 하기도 하고,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기도 한다.

 

별 게 아닐 수도 있는데 난 사람들에게 여간해선 말을 걸지 않고 누군가 말을 걸어도 대화가 최대한 이어지지 않도록 단답으로 말하는 이다.

 

낯선 곳에서 만난 이는 나의 과거를 모른다. 나의 현재를 모른다. 그저 내가 일러준 선택적인 정보로 나를 인지한다. 생각해보면 그 어떤 때보다 편견 없이 나란 사람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이름과 국적과 나이만을 겨우 안 채로 낯선 곳에서 낯선 이와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지루함을 모를 것 같은 순간이다. 

 

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여행지에서 있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던지 간에 나는 부질없는 하룻밤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유달리 비포 시리즈를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돌고 돌아서 어긋나고 엇갈려서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만날 사람은 다 만나고 사랑할 사람은 다 사랑하는 거지.

그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