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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 풀잎들을 보고 생각한 것 홍상수의 영화 풀잎들을 보고 생각한 것

홍상수의 영화 풀잎들을 보고 생각한 것

2022. 10. 5. 19:21Film

풀잎들 (2018)
감독 / 각본 : 홍상수
출연 : 김민희, 정진영, 기주봉, 서영화, 김새벽, 안재홍, 공민정, 안선영, 신석호, 김명수, 이유영

 

줄거리

주인공인 아름은 안국동 후미진 골목길에 위치한 카페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글을 쓴다. 사람들은 카페 안 공간에 앉아 저마다의 이야기를 한다. 바깥에는 건너편에 슈퍼 주인이 심어놓은 새싹들이 고무대야 안에서 자라난다. 각기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지만 밤이 될 때까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서로에게 익숙해진다.

 

※ 영화 <풀잎들>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홍상수를 좋아하세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영업부 사원인 그레고리가 별안간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갑충이 된 서사를 담고 있다. 벌레가 되어버렸다는 사실만 기이할 뿐 추후 그레고리에게 벌어지는 상황은 무척 실존적이다.

 

작년에 독서모임을 할 때 <변신>이 주제였던 적이 있었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사람이 자고 일어났는데 갑충이 될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요. 상식적이지 않잖아요.'라고 말했다.

 

갑충이 된 것은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가장이 사회에서 가장에서 어떤 역할로 변모하는지를 상징적으로 은유하여 보여주는 장치이다. 그들은 벌레가 됐다는 사실에만 매몰돼서 갑충이 함의하고 있는 진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랬던 거 아닐까.

 

내가 홍상수의 작품을 보면서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그의 작품 속 코드는 모두 은유일 뿐인데 불쾌한 장치에만 매몰되어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한 게 아닐까.

 

<풀잎들>은 홍상수 감독의 작품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풍기는 영화다. 대화하는 캐릭터를 한 프레임에 담아 관조하는 느낌을 주는 앵글이라거나 인물들이 다 같이 모여 술자리를 갖는다거나 하는 건 그의 작품 다웠지만, 어찌 보면 껄끄러울 수도 있는 '죽음'에 대해서 여러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당신 얼굴 앞에서>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죽음을 앞둔 한 인물의 하루를 좇아 그려낸다면 <풀잎들>은 카페라는 공간에 방문하는 모든 인물들이-아직은 죽음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들이- 하나같이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름이 식당에서 카페에서 엿들었던 모든 인물들은 죽음과 얽혀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관계와 죽음이다. 전부의 사연을 알 수는 없지만 친구나 연인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유명을 달리하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본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다.

 

그들은 돌아가며 카페 앞 화분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풀잎에 담배 연기를 뿜어댄다. 아주 작으면서도 담배연기를 그렇게 많이 맞으면서도 풀잎들은 꼿꼿하다. 삶과 풀잎이 비슷하단 걸까. 그렇게 연약하면서도 쉬이 죽지 않아서 저들끼리 의지하며 부둥키고 살아가는 풀잎들처럼, 결국 사람도 그렇다는 걸까. 

 

치사하고 더럽고 간사한 관계.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는 사람 간 관계. 

 

그의 영화엔 거의 대부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못나고 지질한 남성이 등장하며 불륜과 간통의 정서가 짙게 배어있다. 어느 하나 이르잡아 이 작품은 아니야! 하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다. 

 

어찌 보면 불륜 같은 것은 사람들이 정말 쉽고 흔하게 저지르는 죄악이기도 하다. 사람을 죽이거나 사기를 치는 것은 저지르기 어려운 것이지만, 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탐하는 것이라면 이미 영화, 드라마, 소설 속에서도 많이 등장하지 않나. 그만큼 만연하기 때문일 테고.

 

자신의 삶을 녹여냈을. 혹은 페르소나 같은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불쾌한 감정이 일었다. 특히 모두가 다 아는 불미스러운 스캔들 이후로 더 그랬다. 나는 그렇게 도덕적이지 않으면서 이상하게도 감독 스스로를 대변하는 듯한 작품 속 캐릭터의 대사나 행동에 화가 났다. 그래서 결국 그의 작품을 피상적으로밖에 감상하지 못했다.

 

작품 속 캐릭터의 도덕성이나 신의를 지적하는 것이 이제와 생각하면 무용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너무 예사로운 것이다. 특별할 게 없는 것이다. 버러지 같은 남자를 보고 버러지 같다 말할 필요가 없고, 멍청이 같은 여자를 보며 멍청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최근에 보았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버러지 같은 성준을 보고 한마디도 하지 않은 이유나, 불륜으로 엮인 여러 관계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그것은 하등 쓸모가 없다.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프란츠 카프카가 갑충으로 변화하는 은유를 사용했듯 홍상수 감독도 늘 그런 캐릭터와 그런 상황을 기저에 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영화를 통해 내보였을 텐데 스스로 색안경을 낀 채 그의 작품을 감상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편향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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