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3. 11:10ㆍTV series
내 최애 미드 중 하나인 디 아메리칸즈(The Americans)
2013년부터 2018년까지 FX 채널에서 방영하였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 미국 워싱턴에서 활약한 소련의 프로그램 디렉토라트 S소속의 고정간첩 필립과 엘리자베스 제닝스 부부의 이야기다. 디렉토라트 S는 60년대에 똑똑하고 유망한 KGB 요원들을 "미국인"으로 훈련시켜 미국에 침투시키는 프로그램으로, 간첩들은 자신의 상관에게까지 러시아어로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디 아메리칸즈에서 필립과 엘리자베스는 러시아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위장으로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아 기르게 하였다.
76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시리즈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디 아메리칸즈는 시즌1부터 비평가들에게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묘하게 레트로 한 감성도 좋고 아무래도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 극의 채도가 한 톤 낮은데 그래서 더 80년대처럼 느껴진다.
나 역시 국가가 분단된 특수한 상황의 국민으로서 고정 간첩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디 아메리칸즈가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의심받지 않는 고정간첩이 되기 위해서 위장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서 산다는 게 너무 재밌는 발상이지 않나.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어서. 실제로 오랫동안 CIA 요원이었던 작가가 있었기 때문에 디 아메리칸즈가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지도.
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집권 시기는 러시아와의 숨 막히는 냉전이기도 했지만 미국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도 레이건이고. 물론 그가 시행했던 모든 정책이 성공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확실한 건 레이건 대통령은 침체될 대로 침체된 미국 경제에 숨을 불어넣었다. 과거는 미화된다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도 레이건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도 입지적인 인물이며 미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80년대 워싱턴에 거주하는 러시아 고정간첩 이야기라니. 미국인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를 끌만한 요소였을 거다.
※ 작품의 설명을 위한 최소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인물 소개
엘리자베스 제닝스를 맡은 케리 러셀
필립과 함께 미국으로 침투한 KGB 요원이다. 필립과 작은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남편인 필립과는 다르게 '소련'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 능력이 뛰어난 요원이며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필립 보다도 한수 위인 듯싶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보다 가족에 더 애착을 느끼는 것 같더라.
의외로 필립보다도 여성인 엘리자베스가 더 강골인데 시즌 첫 에피소드부터 남편인 필립은 전부 자백하고 미국으로 귀화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엘리자베스에게 이야기한다. 몇십 년간의 고정간첩 일에 회의를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걸 안 느끼는 게 더 이상하고.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는 택도 없지. 엘리자베스가 훨씬 더 피도 눈물도 없는 편.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메튜와 부부 관계이지만, 서로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필립과의 대화를 상부에 보고해야 말지 고민하더라.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미국으로 온 이후 엄마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몰래 들으며 엄마를 많이 그리워하더라. 이런 거 보면 영락없는 그 누구의 귀한 딸일 뿐인데.
본래의 러시아 이름은 나데즈다. 시리즈 제작자에 의하면, 영국 왕가의 엘리자베스 2세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필립 제닝스 역할을 맡은 매튜 리스
엘리자베스와 함께 부부로 위장한 고정간첩으로 오래된 미국 생활 때문에 미국과 미국 생활에 호감을 갖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미국으로 귀순할 생각도 하고 있고. 필립 역시 엘리자베스처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최고 능력의 요원으로서 업무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고정간첩이란 삶 자체에 대해서 회의감을 많이 느낀다. 위장으로 결혼하였고 아이도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낳았지만, 필립은 엘리자베스도 사랑하고 아이들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보다 인간미가 훨씬 많이 느껴지는 캐릭터이며, 엄격한 엘리자베스보다 아이들에게 훨씬 다정한 아빠이기도 하다.
러시아 본명은 미샤. 제작자에 따르면 영국 왕가의 필립 마운트배튼에서 이름을 차용했다고 한다. 매튜는 ABC사의 브라더스&시스터즈에서 게이 캐릭터인 케빈 워커로 유명하기도 하지.
페이지 제닝스 역할을 맡은 홀리 테일러
제닝스 부부의 첫째 딸인 페이지. 똑똑하고 말도 잘 듣는 착하고 예쁜 딸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80년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생김새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홀리 테일러는 묘하게 러시아인 느낌이 나기도 한다. 극 중 러시아인인 엄마 아빠보다 더. 혹시나해서 서칭해보았더니 홀리는 캐나다생이다.
하키를 좋아하고 자신의 가족이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는 헨리와 달리, 속 깊은 페이지는 점점 커 가면서 자신의 가족이 보통의 가족과는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엄마와 아빠의 친척이 하나도 없다는 점과, 늦은 밤 미스터리 한 전화를 받으면 엄마 아빠가 바로 집을 나가고 새벽 늦게 들어오는 것을 의아하게 느끼는 때가 오더라. 당연하게도.
스탠 비맨 역할을 맡은 노아 에머리히
FBI 간첩 부서에서 일하는 요원이다. 스파이 전담반에 있기 전에는 언더 커버로 일하였다. 능력 있고 실적이 좋은 요원이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도 큰 편이다. 어느 날 제닝스 부부의 옆 집으로 이사와 버렸고 제닝스 부부가 혹시나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된 것이 아닌지 걱정하였으나 정말 우연히 옆집으로 FBI 요원이 이사 온 것이었다. 간첩과 FBI 요원이었지만 필립과 스탠은 찐 우정을 나누었다. 필립은 오랫동안 자신이 스파이임을 숨겨왔지만 스탠에게 갖고 있었던 감정은 진심이었을 거다.
필립은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는 인물이지만 부인에게 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바보. 그 당시 그런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는 하더라. 정보원과 사랑에 빠지는 요원.
국가와 가족 사이의 딜레마
제닝스 부부는 슬하에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있다. 상부의 지시로 인하여 아이를 갖긴 하였지만, 여느 부모처럼 제닝스 부부에게도 페이지와 헨리는 금쪽같은 자식이다.
항상 페이지와 헨리는 "미국인"으로 키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필립이 고정간첩 생활에 회의감을 느낀 가장 큰 이유가 아마도 아이들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수년간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왔지만, 막상 미국에서 20년을 살아보니 여러 면에서 소련보다 미국이 낫다는 점을 몸소 느끼지 않았을까.
엘리자베스 역시 당연하게도 아이들이 커가면서 국가보다 가족에게 더 마음을 쓰게 된다.
필립과 엘리자베스는 상부의 지시로 결혼하였다. 필립은 자신들의 결혼이 상부로부터 임의로 배정받아 결혼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엘리자베스가 선배고 신임을 받는 요원이었는데 여러 후보들 중에서 필립을 선택하여 결혼하게 된 것이다. 필립은 이 사실을 아주 늦게 알게 되었다. 둘은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몇십 년의 결혼 생활 동안 서로를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게 되었다.
페이지가 조금씩 성장함에 따라 부모 몰래 교회를 다니기도 하고 미국 문화에 심취하는 여느 미국 10대처럼 커가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크게 걱정한다. 필립과 엘리자베스는 항상 자신들의 아이들 만큼은 '미국인'으로 키우는 거라고 합의를 하였지만 말이다. 나는 페이지에게 가장 연민이 갔다. 왜 시즌 파이널 에피소드에서 페이지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
"FOR MY COUNTRY"
필립은 고정간첩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회의감과 자책감 등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너무나도 관두고 싶어 하지만, 엘리자베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끊임없이 괴로워하면서도 상부의 지시를 순순히 따른 이유는 순전히 엘리자베스 때문일 거다. 엘리자베스는 성공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무모한 일을 할 때나, 아니면 선량한 일반 미국 시민들을 '국가의 이익'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일 때에도 항상 "For my country"라고 대답하더라. 적어도 어디같이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것이라곤 하지만, 마치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무슨 일이든 저질러도 되는 면죄부라도 주어진 마냥.
이 두 부부는 고급 정보를 캐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는 편이다. 여러 방편 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상대의 연인이 되는 방법이다. 10대도 문제없이 꿰어낸다. 파이널 시즌 에피소드에서 페이지가 엘리자베스에게 "Are you whore?"라고 하기도 하더라.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
이 밖에도 무수히 많다. 사람을 꾀어내서 포섭하고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부끄럽고 나쁜 짓을 많이 하였다. 사람 감정 가지고 장난치는 건 가장 나쁘지 않나.
참고로 포섭당한 자들의 결말은 매우 비참하였다. 자신들을 믿은 죄로 끔찍한 최후를 겪은 그들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어느 한 에피소드에서 엘리자베스가 임무를 수행하러 갔는데 원래 그 공장에는 아무도 없어야 하지만 노부인이 있었다. 변장을 하고 갔다면 살려줄 수도 있었으나 아무도 없어야 하는 빈 공장이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변장을 하지 않았었다.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이 명백하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그 여부인을 죽여야만 했고 노부인이 복용하는 약을 다량 복용하게 함으로써 심장 발작을 일으케 사망하게 만든다. 그 부인이 죽어가는 동안 옆에서 말동무를 해주는데, 노부인이 엘리자베스에게 개인적인 질문들을 하나 둘 꺼내 놓는다. 엘리자베스 역시 곧 죽을 사람이니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고. 노부인은 자식이 있냐고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다고 대답하니 노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자식이 있는데도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The Decent Ending
개인적으로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국가를 위한다는 '그들만의' 정당한 대의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합당한 최고의 결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정간첩인 게 발각돼서 감옥에 수감되는 것보다 혹은 사살되는 것 보다 훨씬 참담하고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디 아메리칸즈는 시즌 6을 진행하는 동안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왔다. 거의 매 시즌마다 그랬던 듯하다. 운 좋게도 기적적으로 위기를 넘기고 겨우겨우 살아남아 시즌6까지 이어졌다.
여담으로, 직업이 고정간첩이다 보니 변장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도 간첩 교육을 받을 때 함께 배운 것 같은데 전부 셀프로 하며(당연히) 보고 있으면 신기하다. 가발과 메이크업을 통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보다 보면 나도 배우고 싶어 진다.
홈랜드를 재밌게 본 분들. 스파이물을 좋아하시는 분들. 탄탄한 스토리와 점잖고 세련된 전개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디 아메리칸즈를 추천드린다.
전개가 빠른 드라마는 아니다. 하지만 너무 몰입하고 보게 돼서 숨이 막힌다.
왓챠에서 시청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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